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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포심 (신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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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공포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홀로 깊은 산중을 걸어갈 때 오는 공포심이 있고, 요즘 같이 회사마다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할 때 '혹시 네가 퇴출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공포심도 있고, 사업 실패에 대한 공포심도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시험에 대한 공포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할 공포심이라든지, 아니면 성적이 떨어질 것에 대한 공포심이라든지, 또는 취업이 어려운 요즘 졸업한 후 취직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비록 환경이 다르고 일하는 분야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공포심만큼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공포심을 가지는 원인과 이유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하나 추적을 해보면 결국 하나로 모아지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문제입니다. 인간의 공포는 생존문제에서부터 돌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생존이 위협받고 흔들리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또는 그런 상황이 예상될 때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발생적입니다.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인간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 아담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아담에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담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공포심 역시 아담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삶의 방식은 은혜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은혜로 사는 것이 본래의 인간모습입니다. 그때는 인간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습니다. 생존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공포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날그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면서 살려주신 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살리는 것은 생존의 욕망이 아니라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이 말한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 인생의 목표는 자기 발전으로 달라져 버립니다. 은혜보다는 생존이 앞서 버린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불신앙의 인간이 되버렸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인간은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주관하는 분이 있다. 그분이 하시는 대로 내 인생을 맡기고 주어진 대로 감사하고 살아가자'가 아니라 '내 인생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인생이다'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생존에 관심을 두게 되자 자연히 생존에 위협을 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가지게 되고, 그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에게는 자기 인생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살만한 일을 했을 때는 신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가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한 사람으로서 징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 3:9.10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즉 벗었다는 것을 나쁜 것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벗은 것은 나쁜 것이고, 하나님은 나쁜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한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서 자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포라는 것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올무입니다. 그렇다면 공포를 떨쳐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존으로부터 공포가 왔기 때문에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숨쉬는 생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숨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숨을 쉬어도 부자로서 쉬고 싶어하고, 세상에서 남들이 부러워 할만큼의 조건을 소유한 채 숨을 쉬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러한 생존 욕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 공포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근심과 걱정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이란 처음과 나중을 놓고 생각하면 모든 인생이 동일합니다.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과정입니다. 공포라는 것은 모두 그 과정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태어남부터 시작해서 죽음까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에서 죽음을 삭제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유독 생존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의 과정이야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인데, 과정에 집착해 버리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잘살아보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다는 공포들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상의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곧 육신의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신자 역시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공포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공포심을 해결하는 길은 생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존이라는 올무에 매어서 태어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올무를 벗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필연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공포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진 것은, '벗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벗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네가 지금 어떤 인간으로 되었느냐?'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처음 창조한 그 모습 그대로의 인간이냐 아니면 사단에 의해서 타락된 인간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께 가지시는 관심은 '어떤 인간으로 되었느냐?'이지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이냐?'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이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를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일을 못지키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매어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군사들이 두려움이 없이 용맹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무기들로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이 담대하지 못하고 용맹하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용맹하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상대방보다 힐이 약하다고 해도 얼마든지 용맹스럽게 싸울 수가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애국심이 얼마든지 인간을 용맹스럽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6.25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군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은 용맹스런 군사가 되라는 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않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 거부하고 있느냐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도와서 승리하게 할 것이니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기보다는 '너희는 본래부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자들이 아니냐?'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겁을 내고 있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지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4절과 같은 본문을 보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까? 모두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하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을 믿지 못해서이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 두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두려움을 물리쳐 달라고 하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두려움을 가져다 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려움은 생존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예를 5절부터 말씀을 합니다. 먼저 5절에 보면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 즉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6절에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7절에는 여자와 약혼을 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두려워서 마음에 겁을 내는 사람도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군사로서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용맹스러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둔 자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초월한 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뜻이 됩니다. 살든 죽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내가 주관하는 문제가 아님을 아는 자만이 두려움이 없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집을 건축한 사람은 전쟁에 참여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대신 새 집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새 집을 지어서 아직 낙성식을 안했다는 것은 새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새 집을 지어 놓고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전쟁에 나왔다면 과연 아쉬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새 집에서 사는 것을 기대했던 것이 다 무너져 버린 상태에서 그 사람은 '전쟁에서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남좋은 일만 시키는 것은 아니냐?'는 번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 집 때문에 전쟁에서 살고 싶어할 것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이상 죽기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 집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기다리는 마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여자와 약혼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앞둔 사람은 앞으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인생 계획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죽어버리면 물거품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전쟁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경우는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전혀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이 무슨 하나님의 군사로서 전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죽으면 내 것을 다른 사람이 가로챌 것이 아니냐는 생각으로 골몰한 사람이 군사로서 전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너희는 어떤 인간이냐?'입니다. 즉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관심거리가 그 마음을 차지한 채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다른 관심거리로 우리 마음을 채운 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서는 공포심이라는 것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지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없는 인간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본래의 인간에게는 두려움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상황이나 문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과연 두려움을 안겨다 주는 상황이 주어졌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서 그 결과를 예측하면서 걱정하는 일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우'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은 쓸데없는 일에 걱정하는 존재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해서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없겠습니까? 이럴 때 인간은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소위 지금의 행복이 깨어질 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렇듯 모든 두려움이란 모두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함께 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없는 인간을 원하신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을 원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새 집을 지었다는 것도 없고 포도원도 없고 약혼한 여자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소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없는데서는 잃어버릴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공포나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인간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만약 우리를 간섭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신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고 넘어지고 실패하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공포심을 가지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과연 나를 마음에 두고 사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주님만 바라보게 하심으로서 점차 생존의 욕구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1절에 보면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많은 것이 적은 것을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많고 적은 비교의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거든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라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이 백성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에게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모든 것을 어린양이 피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제사장은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가 있는 민족이지만 이방인 어린양의 피가 없는 민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있고 없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이미 홍해사건을 통해서 체험한 이스라엘입니다. 똑같이 갈라진 바다에 들어갔지만 어린양의 피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살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들을 쫓던 애굽은 죽었습니다. 결국 생명은 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피가 없는 민족은 전혀 두려워할게 없다는 것이 제사장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피가 아닌 썩어질 것을 바라볼 때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공포심을 가질 수박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제외한 인생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로 살든 거지고 살든 권력자로 살든 약자로 살든 누구나 똑같이 죽음이라는 문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볼품이 없는 것 같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돈보다도 쓸모 없는 것같이 생각이 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은 죽음을 보지 않고 과정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피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생존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지도 못할 것이고 자식을 잘되게 하지도 못할 것이고 힘을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여러분의 운명을 바꿔버립니다. 그 때는 천하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피 앞에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소유를 가지고 생존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체험한 제사장들입니다. 그 피가 여러분을 의롭게 할 것이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하게 한 것같이 죽음을 통과하게 할 것입니다. 인생의 과정보다는 마지막에 시선을 두고, 썩어질 소유보다는 그리스도의 피에 마음을 두고 살고자 할 때 두려움에 떨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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