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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 화 (신 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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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화(신 20:10-20)

신자란 인간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책임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현 신자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이 인간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실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책임감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서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이 도리를 잘 지키면 그 사람은 착하다는 칭찬을 받게 되고, 지키지 못하면 나쁘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인간에 대한 도리를 다함으로서 칭찬을 받을 때 그것을 신자의 도리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도덕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을 다하려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인간을 원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에게 책임을 다하는 신자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신자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인이다'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그 사람은 이름만 신자라고 붙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신자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라면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살게 해달라고 하면서 비록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려고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세상 사람과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느 범주에 속한 자로 살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오는 자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잘 감당한 것처럼 떳떳하게 교회에 나오고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신자의 책임은 교회에 잘 나와주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책임은 죽도록 충성해도 부족하고 설사 내 목숨을 바친다고 해도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목사든 평신도든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책임으로 사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가 인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의 눈치를 보고, 교인은 목사의 눈치를 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책임만 생각한다면 목사는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럴 때 주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며 모이는 교회는 잘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못난 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책임, 교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모이기 때문에 결국 잘한 사람, 못한 사람의 구분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절에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성을 칠 때 그냥 치지 말고 먼저 평화를 선언하고 그 평화를 받아들이면 함께 거하고 그렇지 않으면 성을 쳐서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볼 때 난처한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도공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은 가차없이 망치로 깨뜨려 버리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피조물을 없애버리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한 권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대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시각을 가지기보다는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편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의 입장만 고수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만 남기실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은 세상에 아까울 것이 없고 겁날 것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이 전멸을 당하는 경우는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면 평화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의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인간의 평화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이 없는 것, 이것이 세상의 평화이고 세상은 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는 아닙니다. 겉으로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서 평화가 아닙니다. 가정이 화목하다고 해서 평화가 아닙니다. 이러한 평화는 불신자의 가정에도 많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란 인간과 인간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사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성을 향해서 '평화'를 선언한다는 것은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라는 평화가 아니라 '너희들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올래'라는 의미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귐에 들어오겠다고 회답하고 문을 열면 함께 거하고 사귐을 거부하고 대적하거든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 아니하면 모두가 진멸당한다'는 것입니다. 16절의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평화는 소중한 것입니다.

마 10:12절에 보면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말씀하는 것도 결국 그 집이 화목하고 아무일 없이 편안하기를 기도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이 함께 하는 가정,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제대로 되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천사가 모든 집을 방문해서 어린양의 피가 발려져 있지 않은 집은 심판하고 피가 발린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때 피를 발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란 곧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 사귐에 들어온 집은 심판의 천사가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느 가정에 가서 하나님의 평화를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가치 있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애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그리스도의 피를 영접한 자는 가치 있는 자로 취급받고 피를 거부한 자는 가치 없는 자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영접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갔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 '이 가정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 가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루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는 뜻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조건 성을 쳐부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는 것은 그 평화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싸워야 할 대상을 구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세상에서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길이라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선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나온 자는 하나님 편으로 살 것이고, 거부한 자는 진멸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10장에서는 나올 때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원을 위해서는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차지하려고 하고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평화를 선언한다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인생은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선언한 평화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도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잘 살 수 있다'는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께 가져야 할 책임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 살면서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책임이요 평화입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잘난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책임을 앞세우면, 자신이 인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했던 것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잘한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면 내가 잘한 것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감사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고백을 하면서 회개하는 신자가 '나 잘났다!'고 자랑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는 신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갈등이 없는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함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한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무엇을 차지하고 얻으려고 하는 욕심은 여러분의 평화를 깨드려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은 서로가 차지하고 얻고자 하고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회보다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내가 교회에서 이름을 내는 것보다 더 가치 없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책보다 장로라는 직책보다 은석교회라고 하는 집단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귀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뭘 더 바라고 무엇으로 자신을 더 채우려고 합니까? 십자가로 부족하고 십자가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그 마음이 주님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세상 것을 더 갖다 부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이 없고 권력이 없고 지식이 없는 것은 겨우 몇 십년 세상을 살면서 좀 불편을 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화를 밀쳐내는 것은 영원토록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일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평화를 선언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고,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나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돈 없어도 괜찮고 공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면서 돈도 벌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되 공부 잘해서 남들보다 더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되 돈벌어서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너도 돈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로 살아가자' 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한 신자는 두려울게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안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목사를 해도 총회 노회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복음만 전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하고, 예는 예라고 하면서 말씀만 드러내고자 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책임으로만 살아가십시오.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게 되면 두려움과 근심만 남을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인간되었음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평화로 살아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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