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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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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얼마 후에 나를 닮은 이상한 놈이 나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놈과 여지껏 28년간을 형제라는 기다란 인연의 줄로 같은 세상에서 같은 공기를 느끼며 살아왔다.
나를 낳아주었다는 어머니라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우리 형제
우리는 형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부모 따위는 없었으니까...
아니 최소한 나에게는 ........
내가 세살 때 우리 외할머니에게 듣게 된 이야기로는
아버지는 일지 감치 다른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우리어머니라는 존재 역시 갓 태어난 우리 불쌍한 간난 애 하나만 달랑 낳고, 어린 나와 갓 태어난 내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그 사람의 삶을 가야만 했다고 한다.
모순이다.
난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때늦은 지금이지만...
심지어는 짐승도 자기 자식을 버리지 않는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우리 형제를 버렸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늙으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내 동생은 아주 심한 병을 앓게 되었다.
아주 두메산골 이였던 내가 살았던 곳은 그때 당시 전기조차도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기에 제대로 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의 병은 급기야 심각하게 온몸으로 퍼져갔고,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그놈은 두뇌성장이 멈추어 버린 저능아가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항상 학교가 끝나 대문을 들으서는 순간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하고 힘들게 있는 그 놈을 난 그냥 무관심하게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 놈 때문에는 난 항상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바보형제' 라는 말이 우리 형제에게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그놈을 가만히 앉아서 쳐다봤다.
나를 보면서 실실 웃고 있기만 한 그놈이 정말 미웠다.
그래서 난 나도 모르게 그놈을 방한구석으로 밀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놈은 울지도 못하고 계속 실실 웃기만 하였다. 난 어린 마음으로 이런 상황이 너무나 싫어 대문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부모라는 작자에 대해서 증오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정말 싫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것은 내 생일과 어버이날 .그리고 크리스마스라는 빌어먹을 날들 이였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남들의 행복은 곧 나의 불행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 그리고 그만큼 외로움의 골 역시 깊어 갔던 시절의 흐름 때문에..
내 곁에서 존재하고 있던 동생이라는 존재 역시도 나를 비관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럴 때마다 대문 앞 동네 개울에 가서 힘껏 돌팔매질을 해대었다.
큰 두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소매 끝으로 난 계속 눈물을 감추고만 있었다.
주변에서 우리를 불러대는 말들이 난 정말 싫었다.
바보형제래요....... 바보 형제래요......
쟤네들 엄마 아빠가 쟤내들 버리고 바람 났대지 ..아마..? 말도마요...소문에 듣자하니까
쟤내 엄마는 미군부대 앞에서 양색시 되었다고 하던데...뭐...쯧쯧 하여간 종자들이 않좋은 아이들이야. 얘..앞으로 쟤네들이랑 놀지 말아라..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다 똑같았다.
우리를 헐뜯지 못해서 안달이 난 모양처럼 우리 형제에 관한 모든 것은 그 동네에 끊임없는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참으로 우스운 건 나도 모르는 어머니 아버지라는 사람의 소식을 그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버려진 아이' 난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이런 편견들을 이기고 싶었다. 나만은 이런 나의 굴레를 벗어 던져 버리고 싶었다. 
악착같이 공부했다...
정말 악착같이..
8살때..
그리고 14살때도 ..
그리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도
난 `악' 이라는 나를 지탱해주는 오기만으로 훗날의 나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도 항상 내 주위에는 아직까지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생이 늘 붙어 다녔다. 그놈은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래도 많았다. 아주 어렸을 때 앓던 병 때문인지..면역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했던 것 같다.
가끔씩 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그놈이 늦게까지 안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놈에 대한 동정심과 형제간의 연민의 감정을 느꼈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 항상 나에게는 감추고 싶었던 하나의 부끄러움이었다. 
어느 날 이었다. 
`혀 엉.. 아..`~~~~
왜...?
난.....왜.....하..악...교 못..가..?
쉽게 나오지도 않은 말로 더듬거리며 말하는 그놈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병신아!! 너 바보니까 못 가지.!!! 너가 왜 학교가냐..? 
하지만 안쓰러움보다는 그놈이 더듬거리며 침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더욱 분노를 느끼게 했다.
.......
내 이야기에 섭섭했는지..
어렵게 뒤돌아 앉더니 혼자서 조용히 가만히 쭈구려 앉았다. 난 갑자기 속으로 그놈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미안하다. 나 같은 놈이 형이라고 ...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형아. 나도 왜 이러는 지 모르겠어..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대문을 박차고 다시 개울로 나가 저주받은 내 삶에 대해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

하루는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눈깔사탕이 눈에 띄길래 그놈 생각이 나서
그래도 동생이라고 두개를 샀다.
역시 오늘도 마찬가지고 내가 대문을 들어서면 가장 반기는 놈은 그놈뿐이다. 

혀...엉..아...왔....어..?
그래...임마..자 이거 먹어라..사탕이다. 
그놈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 졌다.
그리고는 할머니를 막 부르기 시작했다.
하..알..머..니..!!!!
혀..엉 ...아.가 나 ..주..려..고 .사 ..탕 .사..왔...어..요...!!!
나....줄...려...고...
그놈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본 거 같다.
그런 것 이였다. 아마도 그놈이 나보다 더 저주받은 삶일텐데...
나 하나만 믿고 있는 놈인데...그놈이 이렇게 작은 거에도 행복해하는걸.
그렇게 좋은 아이인데...
내 하나 뿐인 동생인데..
저렇게 작은 사탕하나가 그놈을 기쁘게 하는 줄 알았다면......
난 그 날밤...
잠들어 있는 그놈의 옆에 가서
19년만에 처음으로 옆에 가지런히 누워 그놈을 꼬옥 안아 주었다.
내 동생인 지형이를 ....
내동생인....
아이를..
`지형아 ! 하지만 형은 너에게 이렇게 대해줄 수 밖 없어. 미안하구나

수험번호 080705번 님은 법학과에 합격하셨습니다.
면장님 댁에서 간신히 전화를 한 통 얻어 써서 합격 결과를 알아본 결과..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걸 알 수 있었다.
동네에서는 그날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인 그곳을 간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전에 내가 그들이 그렇게도 기피했던 어머니는 양공주. 아버지는 바람둥이의 아들인
버려진 자식이라는 걸 잊은 듯 자신들의 일인 양 마냥 기뻐했다. 

난..난..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가증스럽다.
세상이...
지형이 역시 할머니에게서 들어서인지 그날도 역시 베실베실 웃으며..
흐..엉..아.!!! 대...학....생...되...는 ..거지...헤헤...
그놈의 축하 방법이었을 것이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놈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 

내가 처음 올라온 서울이라는 곳은 정말 내가 살던 곳이랑 너무 다른 천지였다.
돌아가는 세상..
돌아가는 사람들....
조금도 서로에게 여유라는 공간이 없던 그곳.
하지만 차가워 질대로 차가워진 나의 성격은 이런 거대한 도시 속에서
더욱 적응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대학생활...
그리고 연애...
공부......
그런 것들이 존재되어진 나의 대학생활은..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스스로의 안정됨과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인가 나 삶을 지배해온 20년간의 긴장감들과 증오감들은 서서히
내 안에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학비는 어느 장학회에서 계속적으로 보내 주었고
성적우수 장학금이 지급되어...내 대학생활은 아무런 불편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어느 날 이었다.
지수학생!!! 급한 편지 왔어!!
하숙집에 들어온 순간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화급히 다가서며
나에게 편지 한통을 전해주었다.
`조모. 타계. 13일 새벽4시. '정안병원'
난 다급히 시골로 내려가야 했고.
아주머니에게 며칠간 못 돌아온다고 연락 오면 메모를 부탁드리며 '태백행' 기차를 탔다. 
여든 여덟 까지 너무나 긴 생을 고생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내가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눈을 감으셨다.
내게 부모님이었던 분.
난 오랫동안 말라버린 눈물이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솟구쳐 오르는걸 느꼈다.
할머니는 유언으로 나로 하여금 지형이를 잘 부탁한다라는 말씀과..
꼭 화장시켜 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난 ..
할머니의 시신이 한줌의 재가 되어버린 작은 상자를 목에 걸고..
마을 앞 강가에 지형이와 조용히 나룻배에 올라탔다..
2월의 바람은 사람의 육신을 식힐 만큼이나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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