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엇으로 사는가? (신 21:1-9)

첨부 1



무엇으로 사는가?(신 21:1-9)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뜻과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무능한 것인가를 깨달을 기회가 있습니다. 겨우 직장을 구했는데 병이 든다든지 물건을 납품할 회사를 구했다 싶었는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난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을 하고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서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잘 안될 때, 그 때 비로소 내 뜻보다도 더 높은 다른 뜻이 나를 이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사 55:9)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면 당황을 하고 어찌할 줄 모르면서 허둥거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오직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에도 내 속에는 여전히 내 뜻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하면서도 속에는 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뜻은 네 뜻보다도 높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내 뜻을 내세워서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지 내 뜻을 위해서 일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 뜻이 포기되어질 때 하나님이 뜻이 나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지 내 뜻이 살아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서 내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을 얻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 46: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살아보겠다고 허우적대고 발버둥치는 자를 향해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십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 됨을 아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에 쉽게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마음 깊이 알고 있기 전에는 순종되어질 수 없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절감하고, 상대적으로 나는 먼지 같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마음속 깊이 절감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들에 피살당한 시체가 엎드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사람을 죽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일을 처리할 것인가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한다면 범인을 찾아낼 수 없는 살인 사건의 경우 그냥 미해결 사건으로 덮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다릅니다. 2절에 보면 피살당한 시체가 있는 곳에서 각 성의 거리를 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을 다른 성을 대표해서 살인 사건을 해결할 성으로 정합니다. 시체로부터 가장 가깝게 있기 때문에 너희들의 성에 살인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성을 그 대표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살인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게는 저주가 임합니다. 1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에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땅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입니다. 은혜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원칙은 은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은혜의 원칙을 벗어난다면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을 내 뱉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땅에서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는 억울한 죽음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원칙을 무너뜨린 행위입니다.

창 8:20절에 보면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하나님께 정결한 짐승과 새를 잡아서 번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부정한 자신들이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노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십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번성과 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에게 계속 전해지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은 고기를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의 후의 세상은 새로운 세상임을 말해줍니다. 홍수 전까지는 땅이 아벨의 피흘림을 하늘에 호소하여 저주를 안고 있는 땅이었지만, 이제는 물로 씻음 받은 은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는 생명임을 잊지 말라고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피흘리는 자는 은혜의 원칙을 거부한 자로 간주하고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셈과 함과 야벳의 사건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었을 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들의 옷으로 덮어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함은 수치를 공개함으로서 수치를 가려주심으로 생명을 얻은 은혜의 원칙을 더럽히고 맙니다. 그것을 알게 된 노아는 함에게는 저주를 하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즉 함은 왜 세상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고 셈과 야벳은 이런 행위를 하는 자가 땅위에서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본문을 살펴 볼 때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 즉 은혜의 땅에 피흘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피흘림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는데, 형제의 피를 흘렸다는 것은 결국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은혜의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야 할 사건입니다. 그래서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이 대표가 되어서 살인자를 알 수 없는 피흘림에 대해서 속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의 방법은 성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곳에서 송아지의 목을 꺾어 버립니다. 알 수 없는 살인자 때문에 죄없는 송아지가 아무 이유 없이 골짜기로 끌려가서 목이 꺾여 죽어야 한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송아지의 목을 꺾고 그 위에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무죄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우리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결백을 주장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피와 상관없는 무죄자임을 고백하라는 것은 약속의 땅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유지되는 땅인가를 잘 알고 있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알기 때문에 죄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알지 못한 살인자에 의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저주를 받아야 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애매한 송아지가 끌려가서 목이 꺾여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살인을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너희들 가운데 살인이 일어났으면 은혜의 땅은 너희를 저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가 송아지의 죽음을 통해서 제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대속이라는 원칙 아래 존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살인 사건으로 인해서 송아지의 목을 꺾어야 했고, 그것을 근거로 무죄자의 피흘린 죄가 제하여짐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대속이라는 원칙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만 죄 안짓고 나만 떳떳하고 나만 바르게 살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은 내가 바르게 됨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교회가 말하기를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있을 때 나는 저주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저주는 살인하고 도적질하는 나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소금으로 빛으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신에게는 저주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에서 벗어난 것만 생각하지 심판 아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해 버린 것입니다.

신자가 심판에서 벗어났다면 그 사람은 죄 용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죄 용서의 경험이 있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무서움을 간직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죄를 싫어하고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심판에서 벗어난 것만 좋아하고 심판에 대한 무서움을 간직하지 않은 채 산다면 죄에 대해서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살인자가 발생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니까 하면서 무관심한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신자는 필연코 죄의 심판과 용서의 흔적을 같이 지니고 살아갑니다. 즉 용서하심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무서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호흡은 나의 의지가 아니요 호흡하게 하시는 분의 은혜임을 알게 될 때 호흡을 하면서도 겸손해질 수 있고, 왜 나로 하여금 호흡하게 하시는지 그 뜻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두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모든 일이 다 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라 할 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리는 자가 따로 있음을 믿는 자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자기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도 허둥대지 않고 조용하게 하늘의 뜻을 물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원래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아는 신자는 자기의 뜻을 앞세워 살려고 했음이 잘못임을 알게 되고 자기의 뜻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만히 있음으로서 하나님 됨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스스로 서려고 하고 스스로 되어 보려고 하는 자신의 잘못이 발견되어지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심판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용서를 말할 때 한가지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가해자를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앞에 죄용서를 구하면서 나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모르고 죄용서를 구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는 전문가가 되버립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사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고 친구라고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동등한 입장에서의 신랑, 친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분이 그 피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에게 신랑으로 친구로 다가오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당하신 예수님의 피해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접만 해드리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은혜까지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 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고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살인 사건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땅에서는 그것이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까지 나의 죄로 여겨야 하는 것이 은혜의 땅입니다. 죄용서함 받은 흔적으로 사는 땅이 은혜의 땅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멸하고 거부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죄를 경험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시고 죄는 은혜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피해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이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함 받은 은혜로 모이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죄에 대한 미움과 경멸이 있어야 합니다. 죄지은 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의 피흘리심을 더럽히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신자이고 이것이 거룩한 교회입니다. 나만 죄짓지 않으면 된다는 것은 이미 죄속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 '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입장에 서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교회에 문제가 있음을 비난하고 원망한다면 그것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의만 내세우는 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그 문제를 누가 일으켰든 상관없이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루속히 문제를 해결해서 교회를 안정시키려고 하게 되면 한 몸으로서 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8절에서와 같이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라는 애타는 마음을 배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은석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충만한 교회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대와 원함이 있다면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필연코 실망만 남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를 향해서 '왜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습니까?'라는 불만만 토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열심히 사랑하려고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 않으니까 내 사랑이 효과가 없다'는 불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란 죄용서를 받은 자로서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모이면 됩니다. 그리고 죄의 모습이 보여진다면 함께 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할 때 은석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살아감을 보여주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