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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결혼 (신 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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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규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보통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행동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을 한 범인을 알 수 없다면, 미해결 사건으로 남겨두면 그만인 것을 가지고,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의 장로들을 불러오고 제사장을 불러오고 한번도 부리지 않고 멍에를 매지 않은 송아지의 목을 꺾고 그 위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무죄하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죄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런 행동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알 때 이해되어지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안다'는 것을 서로 분리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즉 믿는 것이 구속사역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듣기에는 이상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교회 나온 목적이 되어버리면 믿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인간적인 수단과 행동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믿음의 선택권을 맡기고서 '나를 믿으라'는 식의 요구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믿음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 '나를 믿으라'는 조항이 없습니다. 다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고. '아무 형상이나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것, 어떤 형상이든 만들어서 섬기지 않는 것,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믿음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믿으라'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하게 여러 가지로 세분해서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계명의 말씀들은 '이렇게 하면 너희가 나를 믿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계명이 아니라 '믿음이란 바로 이런 모습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십계명을 대하는 현대 교인들의 실수는 십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십계명에 접근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너희가 나를 믿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계명이며, 따라서 십계명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들로서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믿으라'를 요구하지 않고,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잊지 않고 있느냐를 묻고 계실 뿐입니다. 즉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하나님이되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그 여호와로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때 '목사님, 믿는 것이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나 같은 것이 아닙니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잊지 않고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런데 제가 굳이 믿음과 여호와를 아는 것을 분리해서 말씀 드린 것은, 현 한국교회의 정서가 '믿음'을 말할 때 '우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구속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여호와'임을 아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종교적 행동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대부분 쏠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염려해서 굳이 믿음과 앎을 분리해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해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믿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을 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기 자신을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자신을 종되었던 천한 자로 인식하지 않는 앎이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천한 종으로 인식하고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 자유자로 놓여나게 된 그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 믿음에서 행동은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관심도 목적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에만 모든 관심을 두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믿는 자의 표상으로 생각하고 맹목적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실천만 머리에 담고 있고 실천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난 주일이나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나오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두고 생각한다면 본문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될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임을 전제해야 합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발견하고 싶어하시는 신자됨의 흔적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하나하나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모인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님이 피흘리셨던 그 사랑의 현장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교회가 흩어져서 각자 가정으로 모일 때도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드러나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정과 연결되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살아갑니다. 남녀가 결혼을 할 때도 이 사람과 결혼을 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을 꿈꾸며 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결국 자기만의 환상이었고 헛된 꿈이었고 부질없는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견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은 행복을 꿈꾸며 가정을 이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간혹 TV에서 방영하는 문화강좌를 들을 때에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고 하면서, 서로 이해하라, 서로 양보하라, 대화를 많이 하라, 참아라, 상대방의 약점을 보지 마라 등등의 실천사항을 제시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해하려고 하고 양보하려고 하고 참아라는 것인데, 아무리 참고 이해하고 양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인내와 의지에 의해서 억눌려진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행복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앞서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 같이 '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가정이 행복해지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내 힘과 의지를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한다면 없는 웃음을 만들어 내야하고 억지로 참아야 하고 억지로 양보해야 하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에 결국 이것은 불행의 씨를 점점 키우는 것이지 결코 행복은 아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갖게 하신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다른 사람에게 신자로서의 본을 보이면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행복에 목적을 두고 가정을 이루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는 것이고 그들도 얼마든지 행복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가정의 행복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고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면 결국 성경을 볼 때도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보게 되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 저렇게 하면 내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신자가 생각해야 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생각할 때 '어떤 가정이 과연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 가정인가?'입니다. 즉 가정을 생각할 때도 자기 행복을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심판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기회로 삼아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이 모든 것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기회로 삼을 때 가정은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가정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심으로 승리를 하고,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포로 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서 그를 아내로 삼고자 할 때의 규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점은 포로는 곧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한낱 재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혹 여자 포로가 아름다워서 주인의 마음에 들었다면 그리고 아내로 삼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주인의 마음대로 아내로 삼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로라고 할지라도 아내로 삼을 때에는 어떤 절차를 거치라고 말씀합니다. 절차란 다름이 아니라 12,13절의 말씀대로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고, 그 부모를 위하여 일 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노예에 지나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삼을 때 이런 번거러운 절차를 거치도록 하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즉 남자가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단지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결혼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까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라는 의도가 살아있는 규례인 것입니다.

포로가 주인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신분이 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주인과 동등한 신분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포로된 신분으로서 주인의 사랑을 받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라고 합니다. 머리를 밀거나 손톱을 베는 것은 결례 의식, 즉 깨끗케 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포로는 이방인입니다. 즉 깨끗지 못한 이방인으로 있다가 이제는 더러운 것을 다 벗어버리고 깨끗한 자가 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의 의복을 벗는 다는 것은 노예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서 일 개월 동안 애곡하라는 것은, 이방 나라 백성의 신분으로 있을 때의 육적인 관계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예전의 부모와 예전에 살던 땅과는 완전히 결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그 여자의 남편이 되고 그 여자는 아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를 아내로 맞이할 때의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배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너희들은 애굽의 포로된 자였고 노예로 있었던 자인데,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포로된 신분에서 자유를 얻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주인대로 '나도 저 여인과 같이 노예였던 사람인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고, 포로는 포로대로 주인의 사랑 때문에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즉 남자를 통해서 여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의미이며 가정의 의미입니다.

결혼은 소유욕입니다. 물론 말은 사랑으로 결혼한다고 하지만, 사랑으로 결혼한다는 그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인 것입니다. 소유욕이 서로 맞아떨어질 때 '우리 결혼하자'가 성사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혼 그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두게 되면 결혼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될 때, 사람은 결혼에 대해서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환상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결혼 자체가 흔들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결혼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이혼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도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데서 오는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도 처음에는 아름다워서 아내로 삼고자 결혼했지만 결혼 이후에 그 아내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 여자를 마음대로 가게 하되 절대로 돈을 받고 다시 팔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즉 종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시 종되었던 신분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신분을 안다면 여인을 다시 버린다고 할지라도 결코 종으로 팔지는 말고 마음대로 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결혼하고 이혼하는 모든 문제에까지 단순한 남녀간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고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과연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하나하나를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을 배우고 깨달아 가는 귀한 기회로 삼고자 하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런 얘기가 또 나옵니다. 15-17을 보면 이번에는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둔 경우를 얘기합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데리고 살 때 두 여자를 동시에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란 한 대상을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여자도 사랑하고 저 여자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자는 넷이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한 부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랑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지 여러 사람에게 동일하게 배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두 아내를 두었을 때 얼마든지 한 여자는 사랑하고 한 여자는 미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여자가 똑같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필이면 미워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이 장자로 태어납니다. 당시 장자는 두 몫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에게 재산을 더 주고 싶어하지 미워하는 여인의 아들에게 재산을 더 주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 더 사랑스러운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사랑 받는 자의 아들을 미움 받는 자의 아들보다 더 앞세우지 말고 미움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해서 그에게 두 몫을 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규례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합니까?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기 감정입니다. 그러나 누가 장자로 태어나느냐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즉 장자의 권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해도 장자로 인정하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으로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복종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이해한다면 결혼을 통해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은 자였다는 것을 알고 자기 아내에게 그 은혜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로서 서로를 바라볼 뿐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랑으로서 신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통로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를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섬김의 위대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결혼은 자기의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것으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자기 것을 고집함으로서 삐꺽거리게 됩니다. 결혼은 내 이기심과 고집을 발견하는 기회이지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나를 발견했을 때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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