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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 제 (신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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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제(신 22:1-4)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성경을 대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은 한낱 잔소리만 늘어놓은 책으로 전락되어 버린 실정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잔소리로 여기고 듣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하나님은 뇌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천국, 지옥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시큰둥합니다. 지옥이라는 곳에 대해서도 전혀 무반응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천국은 가면 좋은 곳으로, 지옥은 가기 싫은 곳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이런 교인들에게 교회는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불러주는 신에 불과합니다. 성경 역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한 권 마련한 책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가죽표지에 금색이 칠해지고 쟉크가 있고, 주석과 여러 가지 설명과 글씨에 빨간색 파란색 등 총천연색으로 잘 꾸며진 멋있는 최신 성경입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성경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교회를 향합니다. 예배당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예배당에 오면 가장 먼저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보를 펴고 먼저 광고를 봅니다. 무슨 재미있는 행사가 없는지를 살피고 주보를 덮고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찬송을 부릅니다. 드디어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검은 가운에 노란 천을 목에 걸친 목사가 등장을 합니다. 목사의 인도에 따라서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고 축도를 하면 드디어 주일 하루 일과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볼일을 보면 됩니다.

이것은 종교화되어진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은석교회 신자는 이러한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종교화된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 종교화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움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할 때 발생하는 것이고, 그 두려움 속에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가 내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없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모두 가짜이고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성경을 대한다면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잔소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억지로 듣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 알고 있는 것을 또 다시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따분함과 짜증만이 몰려 올 뿐입니다. 그러면서 간혹 들려오는 우스개 소리에 짜증을 해소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견딜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깊이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일치된 삶을 살아가고자 성경을 대하셨습니까? 마지막 때 멸망에 빠지는 실패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로 다가올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는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아픔속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퍼짐으로서 여러분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안주해 버릴수록 성경은 하기 싫은 것을 요구하는 부담거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존재한다면 성경은 여러분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로 다가올 것입니다. 과연 어떤 마음에서 성경을 대합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알려주고, 어둠에서 나에게 빛을 발견하게 해주는 말씀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귀찮아하는 요즘의 시대에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는 백성이 있고, 세상 나라에 맞는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 나라에서 살기가 버겁습니다.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나라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방식이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고 거부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흔히들 '천국 가고 싶다'는 말들을 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천국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거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이 꿈꾸는 인간이 살기에 최상의 삶의 환경일 뿐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도 그 표현을 보면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4절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합니다. 눈물을 씻겨주시고 사망,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에 맞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라에 맞는 사람을 고르실 때 인격이 있다거나 세상 욕심을 버렸다거나 착한 일을 많이 한 것을 보고 고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한가지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과 열심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한 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자체가 예수님의 공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찬양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맞는 백성은 세상에서부터 자기의 공로는 보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과연 누가 그 사람인가를 구분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누가 하나님 나라에 맞는 백성인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형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형제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와 상관없고,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이 내 맘에 들고 나에게 잘해주고 성격적으로 잘 맞는 사람이라면 친절하게 잘 대해주고 어려울 때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또 설령 전혀 모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알았을 때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를 돕는 문제는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차원에서의 형제라면 성경도 결국 윤리에 지나지 않게 되고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분점이 사라지고 맙니다.

성경에서 형제를 도울 것을 말할 때는 형제를 돕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형제를 돕는 것은 그냥 형제가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도와주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형제를 대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도와준 자만이 천국에 가서도 끊임없이 예수만을 높이고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끌어다가 형제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혹 형제의 집이 멀면 집으로 끌고와서 형제가 찾아오기까지 잘 돌봐주라는 것입니다. 또 형제의 나귀와 소가 길에서 넘어진 것을 보면 반드시 일으켜 세워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실천사항처럼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뭐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이냐? 이정도로 천국 간다면 아무나 가겠다'라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형제 같으면 형제의 소유물에 대해서 보호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좋지 않은 형제라면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 일 때 '잘됐다'라는 마음으로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그 형제가 재산상의 손해를 입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상대방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흔히 형제 자매란 호칭을 많이 쓰기도 하는데, 과연 형제가 무슨 의미의 말입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형제란 서로 피를 나눈 혈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란 혈족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비록 혈족으로 형제라고 해도 서로 미워하고 경쟁하고 원수같이 지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라는 것은, 같은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형제라는 것도 아니고, 혈족으로서의 형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의 형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같은 사고방식 안에서 성립되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이라는 곳을 눈앞에 두고 모세로부터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땅이기 때문에 은혜가 이스라엘의 중심 사상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가 중심 사상으로 되어 있을 때 형제에 대해서 본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 내에서 형제의 소나 양에 대해서 본문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내에서 은혜라고 하는 중심 사상이 깨어진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즉 형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느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걸맞은 은혜의 사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형제에 대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마 12:5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혈족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계,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형제관계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현재 혈족 관계를 모두 무너뜨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형제도 버리고 부모도 다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형성됩니다. 아무리 혈족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해도 그 속에서 싸움과 미움이 발생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속성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싸움과 미움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형제입니까? 그것은 그냥 혈족 때문에 할 수 없이 형제라는 법적 관계를 유지할 뿐이지, 사실 만나기 싫고 함께 하기 싫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기 때문에 형제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보통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비유입니다. 눅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라고 되묻습니다.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고,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싶어서 이웃이 누군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깝게는 내 옆집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넓게 생각하면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넓게 생각하면 같은 시, 같은 도, 같은 나라,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지구인이 다 이웃이고 하나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올림픽을 할 때도 '손에 손잡고'를 부르면서 모든 지구인이 다 한 이웃이고 하나라는 캠페인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망상일 뿐입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과도 이웃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서 다른 나라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겠습니까? 옆집과도 손익의 문제가 발생하면 언성을 높이고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가는 자기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이용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이웃이 성립될 수 있으리라 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것을 봤으면서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무관심이었고, 귀찮은 일을 떠맡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다가가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즉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혈족이고 옆집에 사는 관계라고 해도 그것은 이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사마리아 사람같이 자비를 베풀어라'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말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자비란 내 속에 자비가 존재할 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자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자비할 뿐이지 타인에게까지 자비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자비를 베풀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나는 자비를 아느냐'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길을 잃어버린 소나 양이 나옵니다. 그리고 넘어진 나귀가 나옵니다. 이와 같이 길을 잃어버리고 넘어진 모습을 바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봐야 합니다.

눅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는 산에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이웃을 불러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또 어떤 여자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부지런히 찾다가 찾으면 벗과 이웃을 불러 즐긴다고 말씀합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로 모이는 성도들에게서 자비가 보여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교회가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소나 양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데리고 와서 형제에게 찾아주고, 넘어진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단지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내가 바로 잃어버린 소와 양이고 넘어진 나귀인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으셨고 나를 일으키셔서 내가 천국 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형제라는 것은 모두가 잃어버린 자이고 넘어진 자라는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깨닫고 그 자비로 살아가게 될 때 가능한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아는 마음으로 서로 만난 교회에서 경쟁과 미움과 다툼이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형제끼리 다툼과 미움과 시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증거임을 알고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자비를 외면하고 산다면 그는 분명 신자도 아니고 천국갈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천국의 속성인 자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비와 사랑으로만 가득 채워진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소망하는 천국은 오직 자기만을 높여주고 자기만을 칭찬하는 천국일 것입니다. 만약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자와 똑같은 대우를 해주면 당장 하나님께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이것은 길을 잃어버린 양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그들을 들어가게 하십니다. 모든 것이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본문과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관계를 깨는 것은, 자기에게 소유된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시각이 형제의 관계를 깨버립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적신'의 위치에서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빈 몸이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모일 때 비로소 형제라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천국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이 없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확인해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귀한 줄 알고 살고 있느냐?'는 자기 확인입니다. 형제를 사랑치 못한 자기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에 기울어져 살았던 자기 모습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 때문에 살아난 강도 만난 자입니다. 똑같이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누가 못났다 누가 잘났다'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만날 때 그것을 가지고 형제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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