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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의 독특성 (신 2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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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갈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고 그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고 교회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 일에 몰두해 있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이고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니냐?'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교회가 교회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내 교회'라는 강한 집착 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교회'에 집착된 이상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그만큼 희미해져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집착! 교회 일에 대한 몰두! 비록 목사들은 이런 것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악한 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이 교회에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있느냐는 것은 신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에 관심을 두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그리스도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의 전문가는 목사들입니다. 목사가 '이 교회는 내 교회다'라는 집착에 빠져있기 때문에 관심은 자연히 '내 교회'가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교회가 관심인 목사가 그리스도에게도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를 사랑할 수 없고 관심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에 관심을 두면 다른 하나는 자연히 관심 밖으로 밀려갑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교회에 집착하고 관심 두는 것을 탐욕이 아닌 믿음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회와 예수님을 하나로 합해버린 것입니다. 즉 교회를 위한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 곧 교회를 위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천국에 관심이 없고 오직 내 교회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까지 이에 동조하고 가세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현대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들이 사라져간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은석교회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계시다면 그 집착을 끊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교회 일에 몰두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단 하나, 주님께 집착하시고 주님께 몰두하시고, 주님만 사랑하고자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선의 길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모든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투자된 나의 수고와 노력과 물질에 대해서도 계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집착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은석교회를 위해서 어떤 투자를 하고 고생을 하고 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면 이 시간 그 모든 생각을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한 것이 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주님만 바짝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에 집착하지 말고 교회 일에 몰두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이 만약 교회에 대한 집착과 몰두에 빠져 버린다면 여러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보다도 교회가 관심사가 되버립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잘되기보다는 내가 잘되고 내 교회가 잘되는 것을 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것은 천국과 전혀 상관없는 반대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는 세계입니다.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내 것이라는 자기 소유개념을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가 그 마음속에 시작된 사람이라면 분명 그 나라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내 교회라는 집착을 나타내 보이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사람되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 자에 한해서 사고방식이 교체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 소유개념으로 살지 않고, 소유개념이 없기 때문에 경쟁하지 않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에 시작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부지런히 '천국을 가고 싶다' '천국이 좋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자기 자신은 갈수록 자기 소유욕으로 충만해지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아서 남보다 편안하게 잘살아볼까만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 영생과는 정반대의 길을 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를 통해서는 세상의 모습만 보여질 뿐 천국의 모습이 보여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형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형제라는 관계 역시 그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사람들이 모였을 때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냥 인간의 모임은 친교일 뿐, 형제는 아닙니다. 친교란 굳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친교는 교회 안에서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싸웠다고 해도 술 한잔 마시면서 풀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풀어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가슴속에 묻어둔 채 미움만 키울 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멋있게 복수할 기회만 찾습니다. 이것이 형제이고 교회입니까? 입으로만 형제요 자매라고 하면 뭐합니까? 진정한 형제 자매의 관계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남남이지 형제 자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형제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만나고 맺어지는 관계이지, 내 교회라는 관계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같은 은석교인이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집착을 해버리면 결국 경쟁은 필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경쟁 대상인 이웃 교회는 자연히 형제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은 복음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까지 거부하게 해버린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내 교회에 집착한 목사의 입에서는 복음을 위장한 인간의 탐욕이 전파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위장된 사탄의 말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을 분간하는 것은, 자기 소유욕을 떠났을 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에 서있을 때 무엇이 탐욕이고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교회 아닌 모습인가가 적나라하게 보일 것입니다. 눈뜬 자로서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구분한 신자는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상 남에게 지려고 합니다. 지고자 하는 가운데 무엇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 자, 넘어진 자들만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넘어졌던 나에게 다가오셔서 일으켜 주신 은혜를 아는 자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보여지기 위해서는 필히 나 자신부터 '내가 바로 잃어버린 자였고 넘어진 자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순수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순수하다'고 하고 혹은 '때가 묻어있지 않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본래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수한 인간은 어떤 인간이겠습니까? 처음 창조할 때의 본래 인간의 모습을 가진 인간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순수함은 아담의 타락으로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선악과에 대한 집착이 인간의 순수함을 파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순수한 인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수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든 모습은 순수한 인간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더러움이 발각된 사람들은 더러움을 인정하기보다도 더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순수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예수님만 죽여버리면 자신들의 더러움을 감춘 채 깨끗한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순수성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자기 집착이 전혀 없이, 자신은 완전히 포기되어 있고 하나님만 높이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잃어버린 순수성이 무엇인가를 고발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 자체가 바로 순수성을 잃어 버린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증표임을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에 집착하고, 제사에 집착하고, 십일조나 구제나 금식 기도 등의 자기 행위에 집착하는 그런 모습들이 순수성이 파괴된 악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더러움의 찌꺼기인 것입니다.

본래의 인간에게는 집착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이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본래의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에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었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도록 허락하신 것만 먹는 구별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세계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깨어진다면 세상은 다시금 무질서로 돌아가게 됩니다. 무질서란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을 멋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서 1:6절에서 말한 대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사탄처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지키고 않고 본래 인간의 창조의 자리에서 떠남으로서 인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무질서의 세계가 되버린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없이 자기가 기준 되어 살아가는 세계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됩니다. 그 세계는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회복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서 자기 지위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집착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명확한 구분을 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5절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는 여자들이 입는 옷을 입으면 안되고, 여자는 또 남자의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즘 옷을 보면 남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옷이 많습니다. 아내가 입는 옷을 남편이 입을 수도 있고, 남편이 입던 옷을 아내가 입을 수도 있습니다. 또 남동생이 입는 옷을 누나가 빌려 입을 수도 있고, 누나의 옷을 남동생이 입을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입고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는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여자로 살기를 싫어하고 남자로 살고 싶어할 때 남장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여자로 살고 싶어할 때 여장을 합니다. 흔히 '게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사람이 남자로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난 자는 남자의 자리와 그 위치에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의 자리와 위치에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가 되고 싶어할 때, 여자가 남자가 되고 싶어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순수성이 사라진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래의 순수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있고 싶어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고 하는 구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면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자연을 보호하라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복과 장수로 연결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복을 누리고 장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질서 안에 순종할 때만입니다.

그렇다면 새 둥지에서 새 새끼나 알을 보거든 새기는 취하여도 어미는 반드시 놓아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어미를 놓아줬다고 해서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미를 놓아주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일치되는 마음일 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미와 새끼를 보면서 저들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살고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없이 새를 봤을 때 새끼보다는 어미가 식용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어미를 취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창조 세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 버린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볼 때도 인간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이 의식이 있는 자라면 분명한 구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절에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고 합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든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누군가가 지붕에서 떨어질 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보다도 타인의 생명을 중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든다면 그만큼 번거롭고 비용이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나에게는 손해지만 타인의 생명을 고려할 때 난간이라는 안전장치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는 자기의 안전을 생각하고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내 집을 지으면서도 타인의 생명까지 염려한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이다'는 의식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신임을 알기에 그 은혜가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쪽으로까지 나눠지는 것입니다.

9-11절에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것이나,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는 것은, 명확한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삶이란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의 풍습과 혼합되지 않는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드러내어야 할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세상의 풍습과 혼합이 된다면 이스라엘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무질서입니다. 세상과 혼합된다는 것은 혼란이며 무질서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세상에 질서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세우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도구로 부름 받은 민족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하고, 자기가 원하고 꿈꾸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세계에서 감사하고 살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된 민족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고,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메어서 밭을 갈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입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고 함으로써 항상 입고 다니는 겉옷에 달린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은 분명히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가진 민족들이고 그 특성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곧 세상과 구분된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잃어버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이 보여지고 있느냐를 봐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 교회로서의 독특성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분명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과 부처를 혼합시키려고 합니다. 종교의 교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방식 자체가 혼합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불교의 구분점이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교회에는 십자가가 있고 절간에서는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구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의 구분일 뿐, 중요한 것은 사고 방식 자체가 구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고 도외시 할 때 인간들 스스로 자기 세상을 창조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기독교이고 무엇이 세상종교인가가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그 창조에 순종하고 살아가고자 할 때 인간은 자기 창조를 포기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서 내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자들은, 현재 창조된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른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질서에 순종하는 교회의 모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이미 세상과 혼합되어서 교회의 특성을 잃어버린 인간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교회에 집착을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신자로서의 독특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명확한 구분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가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다면 여러분은 진리가 아닌 것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을 것이고 세상 사고방식에 혼합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과 어두움의 구분이 없고 혼란스럽고 창조 질서가 깨어진 세상에,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고 혼란과 질서를 구분하고 창조 질서에 순종하는 순수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을 여러분이 믿고 있고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다면 여러분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신자의 독특성이 배어 나올 것이고, 그 독특성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 사고방식과 구분된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가 제일이고 자기를 위해 살고 있지만, 신자는 오직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물로서 피조물의 위치와 자리에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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