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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 회 (신 23: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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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무엇입니까?라고 할 때 '교회는 세상의 온갖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 즉 신앙과 순종의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고전 3:16절에서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에게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면 교회는 곧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이상적인 욕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소위 서로 사랑하고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면서 빛을 발견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자 하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분명 교회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공동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교회에 나온 자에게 믿음을 가르쳐서 믿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욕심을 버리자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욕심이 오히려 교회를 붕괴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의 대변자로 굳게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의 대변자로만 굳게 서있지 못하는 것은 모든 관심을 교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교회는 설교의 중심이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하자'는 요구사항만 남발하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붕괴되어진 교회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교회답게 보이고 이상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고 그 정신이 발산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는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두고 철저하게 예수님의 대변자로만 존재할 때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교회 자신에게 관심을 두거나 교회 자신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든가 '이런 교회로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은 대단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입니다. 그 순간 이미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아닌 교회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나는 우리 교회가 좋다' '나는 우리 교회가 싫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말을 소위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에게서 수도 없이 많이 들어봤습니다. '교회가 싫어서 교회에 나가기 싫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습니다. 다니는 교회가 싫어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물론 그것이 진리의 문제이고 복음의 문제라면 사정은 다릅니다. 그 교회에서 전해지는 복음이 복음이 아닐 때는 얼마든지 복음이 있는 것으로 옮길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닌 교회에 관심을 두고 교회를 찾아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이 아닌 교회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개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교회인을 양성하는 양성소로 전락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가 좋아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좋아서 교회를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으로 교회가 받아들여지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로 모여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를 받아들이고 교회로 모여지는 것이라면 교회에 대한 좋다 싫다는 감정이 마음에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좋다' '싫다'는 것은 선악체계로 살아가게 된 인간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두고 '좋다' '싫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취미, 성격, 생각, 이런 것들이 어우려져서 자기만의 기준이 형성되고 그 기준에 의해서 '이것은 좋다' '이것은 싫다'는 판단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두고서도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싫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선악을 알면 각기 자기가 기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 인간의 실체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자는 교회 일을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신자가 있습니다. 교회에 목적을 둔 교회는 이미 붕괴되어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의 목적을 찾는 교회는 끝까지 버티는 교회로 남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고 이상적인 욕심을 두지 않습니다. 간혹 흔들리고 부딪히고 눈살 찌푸릴 일들이 발생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목적을 두고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 이상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이상에서 벗어난 교회를 보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모이는 교회라면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단지 교회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목적을 두고 교회를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되어지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5,16절 말씀을 보면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그가 너의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종이 도망왔거든 그 종을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지 말고 그가 살고자 하는 곳을 택해서 함께 살고 그를 압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피하여 도망을 쳤다면 그것은 분명 포악한 주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주인이라면 도망친 종을 다시 돌려보냈을 때 주인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방 나라에는 종이 도망을 치면 다시 원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라는 조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종의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주인의 입장에서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조항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종에게 이방 민족처럼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종으로 있었습니다. 자유가 없고 주인으로부터 학대 받으면서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나님이 품에 안아 주심으로서 종에서 자유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종이 도망쳐 왔을 때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서 함께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을 볼 때마다 '우리가 저자와 같이 애굽의 종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들이다'는 것을 되새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았으면 영원히 고통속에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나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끊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며 교회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셨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었다면 우린 여전히 사단의 종으로서 죄에 눌리고 자유 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유도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희생을 밟고 자유 안에 살아가게 된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망친 종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종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담아두시고 그 사랑과 자비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자 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의지하고 산다면 자연히 이스라엘안에서는 하나님의 모습이 사랑과 자비가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지하고 모이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반대되는 것이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창기의 번 돈,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 같은 자란 17절을 보면 미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동이란 예쁜 남자를 말합니다. 즉 남자 접대부로 생각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을 팔아서 번 돈을 여호와의 전에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돈을 내는 자가 몸을 판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망각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헌금하는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헌금하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복종하는 표로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것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돈을 벌었다'는 표로서 헌금을 하는 것인데, 몸을 팔아놓고서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직 돈벌기 위해서 몸을 팔고 있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여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와 자비하심에 복종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을 좋아하시고, 헌금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헌금할 것을 요구하고, 헌금만을 요구하다 보니까 무조건 돈내는 것이 최고로 여겨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돈많이 벌어서 많이 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헌금을 많이 할 수 있고, 헌금을 많이 해야 교회 건물도 짓고 목사 월급도 많이 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몸 팔아서 돈버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돈없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사는 것이 신자이고, 그런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라면 그 교회의 특징은 '우리는 돈없어도 산다'는 외침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돈이 없을 때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는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돈이 안들어오기 때문에 교회가 안된다는 생각으로 '헌금하라'는 것을 강조 해버린다면 결국 그것은 은혜와 자비로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돈으로 모이는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몸파는 것, 즉 매춘과 같은 것입니다.

19,20절 말씀도 보면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에게 꿔준 것이 있을 때 그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종에서 자유자로 살아가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은 내가 번 것이 아니다는 사상입니다. 즉 내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자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사랑으로만 모여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돈놀이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혹 돈을 빌려줄 일이 있으면 이자를 받지 않고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해서 돈을 빌릴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안됩니다. 하나님은 형제간에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과정에서 이자를 받지 않음으로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되새겨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자를 받지 않고 빌려줘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침 받을 수 없는 타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괜찮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볼 때 이러한 규례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라는 공동체는 서로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에 목적을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신자가 서로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배우기 위해서 모인다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하늘 나라만의 독특한 모습을 비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와 자비로 사는 삶을 떠나있는 것이고, 교회는 이미 붕괴된 것입니다.

또 21-23절을 보면 서원한 것은 반드시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물을 드리기로 자원을 했다면 그것은 입으로 언약한 대로 반드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하나님께 한번 작정한 것은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특히 헌금을 작정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행해야지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어떻게든 그 돈을 손해보게 하실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대로 신앙인이 모인 공동체는 각자 자기 믿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과 미련함과 믿음 없는 모습은 다른 형제들의 삶과 믿음의 모습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나로 인해서 보여지는 믿음의 행동은 나 한사람의 유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은혜로 살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르쳐주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 편함을 앞세우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를 목적으로 나오지 말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은석교회라는 단체의 성장과 발전에 &49593;점이 맞춰지면 안됩니다. 함께 은혜로 사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 붙들려서 쓰여지는 도구로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물을 바치고자 자원을 했거든 더디 하지 말고 입으로 언약한 대로 시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자원한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을 어긴 죄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자원한 대로 하지 않음으로서 형제에게 '서원을 해도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구나'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형제를 위해서 서원한 것을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24-25절의 말씀은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를 따먹을 때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라고 합니다. 또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 갔을 때에도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은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또 어떤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포도원의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나에게 포도를 먹게 해서 배부르게 하신 분은 여호와시니 내일도 역시 나는 하나님이 은혜로 먹고 살아가는 존재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세상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내것 네것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남의 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다릅니다. 내가 벌어서 내 힘으로 챙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함께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의 삶은 하나님께 달려 있지 내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포도를 그릇에 담는다는 것은, 지금 배부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서 내일까지 미리 준비하려는 불신앙이며 욕심입니다. 곡식을 낫으로 베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 손에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챙기고 모음으로서 미래까지 자기 힘으로 대비해 보려는 탐욕에서 나온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인가 하면 은혜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보이는 세상에 살고 보이는 것들이 필요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소망은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에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시는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가십니까? 제가 이것을 묻는 것은 이런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려고 해도 우리의 욕심이 방해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 엉터리 같은 나를 사랑하시고 품에 안아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주님의 피를 밟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바로 도망친 종인데 그리스도가 받아주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모여서 교회를 위해 어떤 큰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보여주고 배우자고 모였습니다. 나를 위해서 교회로 모인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일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복종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 복종되어진 자로 살아갈 때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은혜가 각자의 삶을 통해서 마음껏 발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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