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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자 (신 24: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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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교회로 모일 때 필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입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모일 때 왜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와야 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불교인들도 왜 부처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고, 기독교인들도 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상실된 채 부처를 찾고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다. 물론 '어쨌든 불교인이 절에 가는 것은 부처를 찾는 것이고, 기독교인이 교회에 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됐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믿으라고 하느냐?'고 투덜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이 신을 찾는 것은 결국 자기 욕망에 이끌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욕망이 신을 찾게 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신이 찾아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이점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가십니까? 하루종일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묵상하며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이란 생각한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나의 본질이 뭘까? 그래 나의 본질은 죄인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생각하는 것이고 들어서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언행입니다. 인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는 인간의 본질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이란 구조적으로 어떤 존재인가?'가 그의 언행에 그대로 담겨진 채 발산되는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언행을 통해서 본질을 어느 정도 감출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언행을 가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보다 앞서서 본질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언행은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단순히 '나의 본질은 죄인이다'는 것을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행 하나하나를 통해서 '역시 나는 악인에 지나지 않는구나'에 대해 스스로 인정 할 수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죄인이야'라고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아니나 다를까 나는 악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구나'라는 것이 스스로 인정되어졌을 때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것은, 많은 신자들이 지식적으로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스스로 죄인임이 인정되어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실태입니다. 교회에 죄인이 없이 모두가 제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관심을 둘 것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까?'가 아닙니다. '내가 과연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최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소위 '믿음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이웃이 있음으로 인해서 증명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을 싣고 있는 언행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 발산하게 되어 있는데,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이웃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의 본질을 이끌어 내는 도구로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옆에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이웃을 내 옆에 있게 하심으로서 항상 시기하고 경쟁하고 미워하는 본질을 끄집어내시고자 하신 것이고, 나보다 못나 보이는 이웃을 있게 하심으로 약한 자를 무시하고 힘을 과시하고 압제하기를 좋아하는 본질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웃을 통해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이 인정되어질 때 비로소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 진정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자의 삶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교회는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믿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믿어지고 의지되어지는 사람은 분명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인데,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아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를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그 본질을 바탕으로 한 삶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해서 22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게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고 합니다. '종'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재물을 얼마나 소유를 하고 살아가게 되든 상관없이 그들의 본질은 종입니다. 만약 그들이 '종'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떠날 때 그들 가운데 종과 같이 눌리고 무시 받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장의 말씀도 도덕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종되었던 자임을 아느냐. 안다면 너희에게서는 이러이러한 모습이 보여져야 하느니라'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몽땅 신자에게 있어야 할 실천의 덕목으로 받아들여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 대한 행함의 요구로 받아들이게 될 때 필히 발생하는 것은 행할 수 있는 것과 행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분량만큼 행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해서 행하고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행할 수 없는 말씀에 대해서는 덮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22절에서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시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21절까지의 말씀은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자에게서 보여질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니까 실천해라'가 아니라 '이것은 자신이 종이었다는 본질에 대해서 기억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인데, 너희들은 과연 어떠냐?'를 묻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심정은 가난한 자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현실이 현재 자신의 모습과 동일할 때 일체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현실의 환경은 달라도 일체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서 자신의 본질로 찾아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질이 종이었다면, 지금은 비록 종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의 자리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종으로서 종을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은 약자입니다. 압제 당하는 자입니다. 고통 속에서 사는 자이고 세상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삶을 불행을 여깁니다. 약자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약자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을 때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 나오는 약자, 즉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본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 힘 포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1-5절까지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남자는 강자로 등장을 하고 여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약자로 등장합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로부터 피해를 입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것이 여자에게는 남자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여자와의 이혼 문제를 말합니다. 1절에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듣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쁜 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즉 아내가 싫어졌을 때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혼증서'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 증서를 써준다는 것은 이혼을 당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재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즉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여자는 부정한 일을 한 외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한 일을 해서 쫓겨남을 당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혼 증서를 써서 여자를 보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것이 여자가 부정한 일을 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부정함을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정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치 되는 일이란, 남자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내에게 어떤 결함이나 다른 여자보다 못난 부분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치가 되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신체적인 결함일수도 있고, 결혼 전에는 미처 몰랐던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자가 자신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혼을 하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는 부정한 일을 한 것이 없이 이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써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자로 하여금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정욕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잘못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혼을 당한 여자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그 남편이 죽었거나 그도 여자를 버렸을 때 전남편이 그를 다시 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도, 모든 일이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으로 인간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라고 말씀하는데, 여자가 몸을 더럽히게 된 이유는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혼하고 홀로된 여자를 다시 취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여자가 몸을 더럽히게 홀로 살아가게 된 모든 이유가 바로 남자의 욕심 때문이었음을 두고두고 잊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절의 말씀도 역시 약자인 여자를 위한 말씀입니다. 결혼을 했으면 군대도 보내지 말고 어떤 직무도 맡기지 말고 일년 동안 아내를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는 말씀입니다.

6절에서 맷돌의 전부나 그 윗짝을 전집(저당하여 잡는 것)하는 것은 그 생명을 전집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도, 맷돌은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도구인데 그것을 저당 잡는 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까지 뺏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생명을 저당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7절은 사람을 납치하여 종으로 부리고 팔아먹는 인신매매를 말합니다. 이 역시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 8,9절의 문둥병의 이야기는 내가 바로 문둥병자임을 알고 문둥병자를 대하라는 것이고, 10-13절에서도 이웃에게 꾸어줄 때 스스로 집안에 들어가 저당을 잡지 말고 꾸는 자가 스스로 주는 것을 받아라고 하고, 혹 꾸는 자가 가난하거든 저당물을 해질 때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 이유도 가난한 자가 저당 잡힐 것은 옷밖에 없는 데, 옷이라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생계이기 때문입니다. 14-15절에서는 곤궁하고 빈한한 일군의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는 것도 가난한 일군은 그날 품삯이 그날의 생계인데 그것을 미룬다면 그것은 곧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의 말씀은 아비나 그 자식이나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각각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은 앞뒤의 말씀과는 달리 이렇게 해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앞뒤의 말씀은 모두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요구를 하시는 말씀인데, 16절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 인간은 결국 각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자가 약자를 도와줘서 약자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자는 강자로서의 책임이 있고 약자는 약자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를 압제해서는 안되고, 약자는 약자대로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한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7절도 객이나 고아라고 해서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고 합니다. 19-22절의 말씀도 고와와 과부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 벨 것을 잊어버린 밭이 있거든 다시 가서 베려고 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놔두라고 합니다. 감람나무나 포도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것들을 하나하나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러한 모습들이 보여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24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8절과 22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18절)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22절)는 이 말씀들은 '네 자신이 바로 저들처럼 옛날에 종으로 살고 압제 당하고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로 살고 과부와 고아처럼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본질을 잊어버린다는 그 자체는 주위에 있는 약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약자를 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힘을 가지고 괴롭히고 고통을 가중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약자를 통해서 나 자신을 본질을 찾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귀찮아하고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것은 약자를 단지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약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통해서 힘으로 살아가고 강자 되기를 소원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약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로지 좀 더 잘살고 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데 정신 팔려있는 우리들의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주위에 약자를 통해서 불신앙을 고발 받고 '내가 바로 망해야 할 죄인입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개 숙이고 하나님께 나오는 그 사람이 진실된 신자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약자와 나눌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잠 14:31절에서 말씀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난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돈 없다고 해서 힘이 없는 자라고 해서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곧 뜻이 있어서 가난하게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똑같은 형편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진 자로,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전혀 없는 약자, 가난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도,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포함된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이유로, 가난하기 때문에 우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난이 없는 세계입니다. 가난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물질이 풍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부자에 대한 구분을 가지지 않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가난은 악이고 부자는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입니다. 가졌다 못가졌다라는 개념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천국은 가난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 세계를 소망하며 산다고 하는 신자들이 돈에 매달리고 부자 되기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결국 천국을 소망한다는 자체가 단지 신자라는 이름을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는 나보다 힘이 없고 무시 받아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무시 받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돈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힘입니다. 여러분이 이 천국을 소망하신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어떤 약자라도 여러분에 의해서 무시를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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