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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정신 (신 2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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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세상의 것을 모르면 많은 불편이 따르게 되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전세를 계약할 때는 등기부 등본을 떼어 봐야 한다든지, 나중을 위해서 가등기를 미리 해놔야 한다는 것 등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식에 무지할 때 때로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알아야 하는 것도 많아집니다. 문명은 발달하는데 지식이 문명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결국 문명에 뒤쳐지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흰머리가 난 반백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친숙할 수 없는 컴퓨터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발전한 세상 문명에 뒤떨어진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학생들이 힘들고 지쳐도 밤늦도록 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도 고도로 발달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배우기 싫어도 배워야 하고 알기 싫어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머리에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가르치고 배우는데 집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또 그것만을 가치 있는 지식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와중에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지식이 있다면 과연 그것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세상을 사는 것이 목적이고 세상에 가치를 두고 있는 자라면 세상의 지식에 모든 가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마음을 두고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다른 세상의 지식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을 단순히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많이 아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린 다른 세상의 지식이란 단순히 성경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마음의 눈이 열려지고, 열린 눈으로 성경을 볼 때 그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지식입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의 눈으로 알게 된 하늘의 지식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발생되어지는 일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고 초조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성령이 임한 자는 단지 성경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대하지 않을 것이고, 성경과 신학지식으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의해서 이용되어지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철저하게 그리스도만을 증거 합니다. 그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서 굴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진심으로 두손들고 주님이 나의 왕이라는 고백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이 우리 앞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누구라 할지라도 성경을 대했다면 먼저 주님 앞에 무릎이 꿇어지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릎이 꿇어진 그 상태로 형제에게 나와서 자신을 굴복시킨 주님을 소개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소위 가르치는 자들이 이것을 도외시할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나 신학교 교수처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대할 위험이 농후합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침으로서 밥 먹고 살아가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성경에 되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부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굴복시킨 주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등장하는 주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교회란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야할 이유는 성경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두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두십시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서 자연히 자신이 굴복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굴복시킨 주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마음껏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신자가 과연 세상 어디에 가서 나를 굴복시킨 주님의 위대함과 능력을 자랑하면서 이 기쁨에 함께 동참하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형제들이 모인 교회, 신자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주님을 자랑하고 형제들과 함께 기뻐하며 은혜를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예배드리고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려고 교회로 모인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는 없이 단지 앎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결코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관심은 성경 지식이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한 불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도의 신학지식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주님께 굴복 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굴복되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 것을 주장하는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입니다. 이 세상이 아닌 새하늘과 새땅이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차지한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굴복되어져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옵니다'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나오는 진실된 그리스도의 형제된 모습이 그리울 뿐입니다. 목사인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같이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자기의 죄를 통회하며 주님만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형제로 만나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목사인 제가 단지 성경을 가르치는 기능적인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고, 신자인 여러분이 교회를 바라볼 때 단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아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말하는 자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말하는 자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앞에 굴복 당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목사로서 단호하게 말씀드릴 것은, 만약 여러분이 고도의 성경 지식을 습득하고 싶으시다면 은석교회로 오지 마시고 신학교를 가십시오. 저는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는 무지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에게서 배울 수 있는 성경 지식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같은 자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저는 다만 성경을 보면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뿐이고, 저를 다스리시고 있는 주님에 대해서 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된 주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소개하는 이유도 우리 함께 이런 주님 안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자신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이 말씀을 대하는가를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계시하시고자 하는지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구절을 목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성경을 펼쳐 놓고만 있는지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오늘의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5-10절까지의 말씀은 시형제결혼법, 또는 계대 결혼법이라고 불리는 고대 사회의 풍습입니다. 즉 시형제 결혼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결혼법이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흔히 시행되고 있던 풍습이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와 같이 시형제 결혼법, 즉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거든 그 죽은 형제의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여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형제의 대를 잇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가문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가문이란 혈통의 이어짐이기 때문에 다른 피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기 가문을 떠나서 남자의 가문으로 들어가서 남자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에 들어온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은 여자는 다른 남자를 통해서 남편의 혈통을 이어갈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같은 혈통이고 같은 피인 형제를 통해서 남편의 가문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형제 결혼법, 또 계대 결혼법이라고 불리는 풍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결혼법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할 규례로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회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풍습을 굳이 이스라엘에게 규례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계시하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라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지니고 살아가야 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애굽의 종에서 벗어난 백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원정신이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전체의 정신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영원토록 유지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지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혈통이 아니라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그 정신은 앞서 말한 대로 은혜와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혈통이 관심이 아니라 종의 자리에서 해방을 맛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정신으로 굳게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정신을 잊지 않고 종이었던 이스라엘의 본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고아와 과부와 객이 발생하게 합니다. 즉 약자를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본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의 본질을 약자를 통해서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약자들이 힘에 의해서 고통받고 눌림 받은 모습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24장의 말씀대로 이웃의 맷돌을 저당 잡는다든지, 돈을 빌려줄 때 저당 잡은 것을 해가 지도록 돌려주지 않는다든지, 가난한 품군의 삯을 당일에 주지 않고 미룬다든지, 객이나 고아라고 해서 그 송사를 억울하게 판결한다든지, 곡식을 벨 때 객과 고아와 과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도 남김 없이 거둬들일 때 하나님은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되었던 자신들의 본질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정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하나님의 규례를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규례에 다른 사회에도 있는 풍습을 동원하신 것은, 같은 모습의 풍습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차별성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사회의 시형제 결혼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통 보전입니다. 순수한 자기 혈통을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남편이 죽은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지 않고 같은 형제에게로 시집보내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관심은 자기 혈통에 있었던 것입니다. 순수한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해서 형제의 아내를 형제가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형제 결혼법은 단순한 인간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약속의 후손이 가져올 영생에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서 이름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영생에 참여함이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름이 이어진다는 것은 약속 안에서 계속 영생의 소망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로부터 이름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힘쓴다는 것은 장차 주어진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지 자기 혈통을 보존하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의 차별성을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 가문, 내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약속의 나라에서 끊어짐을 염려하는 것으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낳은 첫 아들로 하여금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정신이었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을 형제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형제에게 주어버리는 것은 희생입니다. 형제는 이러한 희생을 통해서 죽은 형제의 기업을 이어줘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죄를 처리하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심정에 앞서 동참했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내어버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7절부터 보면,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사실을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고, 장로들은 형제의 아내로 하여금 그 형제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도록 합니다. 신을 벗긴다는 것은 종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을 말하고, 침뱉음을 당한 것은 수치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 희생을 거부하고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마음에 약속의 후손이 오심으로 성취되어지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어짐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약속의 후손이 오심으로 성취되어질 영생이었습니다. 약속이 주어진 나라로서 그 약속이 성취되어질 것을 소망하고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메시야가 오심으로 주어질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광야보다 모든 것이 풍족한 나라입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취해서 보이지 않는 약속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형제 결혼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나라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1-12절의 말씀도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치는 자의 음낭을 잡거든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규례이지만, 하나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규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낭이란 이스라엘을 이어가는 씨를 말합니다. 때문에 음낭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씨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무시한 행동이기 때문에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결국 약속의 후손을 통해서 영생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속에 담겨있는 약속의 정신은 희생입니다.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희생을 거부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약속 안에서 미래를 바라보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취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희생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죄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도 형제를 천히 여기지 않아야 했고(1-3절), 일을 시키되 먹여가면서 시켜야 했으며(4절), 저울추를 공정하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돈을 벌어 잘 살기 위해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음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의 피곤함을 틈타서 뒤에 쳐진 약한 자들을 친 것을 기억하고 아말렉이란 이름을 도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골라 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자임을 모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약자를 골라서 약자를 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자임을 안다면 약자에게든 강자에게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주어질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정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유함에 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우리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죽은 자이고,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내 이름이 약속 안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면 이제부터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하는 것은 약속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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