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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강 (신 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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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자기 구원에 매인 인간이 각기 자기 마음에 드는 종교를 하나씩 골라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종교적 형식을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면 '맞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기독교까지 포함해서 말을 하면 얼굴을 붉히면서 반발을 합니다.

그런데 반발을 하는 그 심리를 파헤쳐 보면 겉으로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를 부정한다는데 대한 반발입니다. 즉 종교적 자존심이 상한데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자신이 선택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령 옷을 샀는데, 누군가가 그 옷을 보면서 '잘못 샀다'라고 하거나 값을 물어보고는 '나는 얼마에 샀는데 당신은 바가지 썼다'라고 할 때 누구나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이유는 옷을 잘못 샀다거나 돈을 많이 지불했다는데 대한 서운함이 아니라 자신에 선택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들었다는데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도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곧 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기독교에 대해서 누구라도 부정적인 말을 하면 즉시 반발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에 매어있는 '종교중독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괜히 절에 가기를 꺼려하고, 지나가다가 절이 보이면 지붕에 돌이라도 하나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이 과연 복음을 아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로운 행동이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자기 것이 옳다고 하는 종교적 우월감이며 불교를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한 적대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종교에 매인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불교를 적으로 간주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으로서 절에 가기를 꺼려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나라에 유명한 절의 거의 모두는 경치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구경하러 가겠다는데 꺼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절에 한번 갔다고 시험에 든다거나 믿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이 신앙입니까? 하나님이 절에 갔다고 벌주는 그런 하나님이겠습니까? 불교에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믿음이 있는 자의 태도로 생각하는 분도 많겠지만 사실 그것은 신앙과 조금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사단의 세력에 매어있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기독교란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하나님을 '나의 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종교' '나의 신', 즉 내가 선택한 나의 것으로 생각할 때 앞서 얘기했던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나의 기독교와 나의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기독교, 나의 하나님은 결국 자기 구원을 위한 종교와 신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종교론, 신론에서 표출되는 사상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에 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니다'는 말에 반발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편이 아니다는 말은 '자기 구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인데, 누가 과연 이러한 말에 순순히 수긍을 하겠습니까?

'자기 구원'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자기들을 구원시켜주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기 구원의 희망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 앞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을 호령하고 심판할 수 있는 강한 자의 모습으로서 그동안 자신들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자들에 대한 원한을 복수해주고 그동안 고생한 대가로서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줄 메시야가 아니라 버림받고 힘없이 죽어갈 약한 자의 모습이 메시야라고 할 때, 이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고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고 죽어버린 메시야의 실체는 이 세상을 향해서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밀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구원에 대한 욕망으로 접근했던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신 여호와가 아니고 인간들이 창작해낸 우상이라는 것이 버림받고 죽어버린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어버린 모습으로 오셨는데, 하물며 멸망 받아 마땅한 악한 우리들이 아들을 버림받은 모습으로 보내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히 내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둘로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여전히 자기 구원에 매어서 나를 위한 신을 찾는 자들과, 하나는 나는 구원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인간임을 예수님 통해서 발견하고 '하나님 저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라는 자기 구원을 포기한 자, 즉 자신을 죽음에 던진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처음과 나중이 변하지 않고,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매어서 나의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하나님이 뭔가 자기편에 서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흔들리고 당황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리고 아무리 기도하고 매달려도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난관으로 빠져 들어갈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의심하게 되고, 원치 않은 결과들을 대하게 될 때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여기는 신앙은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 이미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 같은 일을 겪는다고 해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발생한 참된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한가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없고서는 흔들림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넜을 때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을 에발 산에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철기를 대지 않은 돌단을 쌓은 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열조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시기 전에 이러한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약속의 땅과 약속의 땅이 아닌 땅의 사이에는 요단강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홍해를 건너지 않고서는 애굽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갈라진 홍해를 건넌 것을 애굽과의 완전 결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요단강을 건넌 것을 약속의 땅이 아닌 세상과의 완전 결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요단강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기존의 세상에 대해서 결별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세상이란 환경이 다른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세상과 살아가는 방식이나 사고나 상식이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 세계가 곧 약속의 땅의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신명기의 규례들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실천해야 할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한마디로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나타나는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은 이 법칙이 무시되고 무너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세상의 차이는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분이 됩니다. 즉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세상은 자기 사랑, 자기 구원으로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요단강을 건넌 후의 약속의 땅이라는 세상은 자기 사랑이 아닌 이웃 사랑이 법칙이 되어서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갑자기 이웃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돌변될 수는 없습니다. 요단강 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비한 효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철야기도회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요단강 이전 세상의 법칙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요단강 이후의 세상 법칙, 즉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법칙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비밀은 율법이 기록된 돌들이 어디에 세워지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돌들은 에발 산에 세워집니다. 에발 산에 대한 얘기는 신명기 11:29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을 보면 약속의 땅에는 에발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심 산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7:11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절반씩 나눠서 한편은 그리심 산에 세워서 백성을 축복하게 하고, 한편은 에발 산에 세워서 백성을 저주하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에발 산은 저주의 산이며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후에 율법을 기록한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율법을 기록한 돌들을 에발산, 저주의 산에 세우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돌을 세우고 제사 드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축복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스스로 저주의 자리에 서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저주는 나에게서 멀어지고 축복만이 다가오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더러 에발 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에발 산에 세우시는 것은, '내가 바로 저주받아 마땅한 자다'는 경험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고 앞으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저주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그들을 이웃 사랑이라는 삶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단강 이전의 세상에서는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습니다. 자기 죽음은커녕 모두가 나 살자고 남죽이는 방식과 법칙에 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구원에 매어 있기 때문에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한 세상과 결별한 약속의 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땅에서는 남의 유익을 위해서 오히려 내가 피해를 감수하는 정신만이 용납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요단강을 건넜다고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넘으로서 자기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앎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된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가를 절실히 깨닫고 스스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다'는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 에발 산에 서는 것이며, 저주받아 마땅한 나는 오직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서만 살 수 있다는 의미로서 번제를 드리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임을 화목제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죽음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물을 것은 '과연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이 신앙을 말하지 마십시오.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는 자는 결국 요단강 이전의 세상의 법칙과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위주로 살아가게 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이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고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게 될 것이고,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에발 산에서 자신들이 바로 죄인의 상태이고 저주받을 상태라는 것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은혜의 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은혜의 땅이라는 것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은혜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나안 땅에만 들어가면 은혜를 받아서 잘살아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은혜의 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아는 자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주받아야 할 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을 때 '저주받아 마땅한 내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인도 하셨기 때문이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가리켜서 상한 심령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에발 산에서 드리는 번제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자기 죽음을 경험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시편 51: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정한 마음'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된 '정직한 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 51: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자기 죽음을 경험한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복이 되는 상태로 말합니다. 에발 산은 저주를 받는 산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는 산입니다. 그리고 그리심 산은 축복을 받는 산이 아니라 축복을 선포하는 산입니다. 결국 에발 산에 서는 것은 상대편에서 선포되는 복을 받는 것이고, 그리심 산에 서는 것은 반대로 저주를 받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합니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저주의 상태와 죄인의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올 때 그것이 바로 복을 받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윤리 도덕 교양을 내세워서 '나는 괜찮은 인간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심 산에 서고자 할 때 그 결과는 저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가 에발 산에 자신을 세운 경험, 즉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하찮게 보이거나 드러나지 않는 일은 하지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나같이 믿음이 있는 신자는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환상입니다. 자신의 윤리와 도덕과 교양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에발 산에 세워 놓고 보면 그러한 모든 것이 위선이고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세상을 살아갈 때는 예수보다는 돈을 더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에발 산에 세운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저주받은 상태에 대해서 캄캄하기 때문에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해 갈 수 있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그 정신은 여전히 요단강 이전의 세계에서 뛰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죽음은 십자가의 경험입니다. 이 십자가의 경험이 계속될 때 그것이 기도로 이어지고 사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모릅니다. 다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육체가 숨쉬고 살아가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살다가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르기를 바랍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세상이 아니라 건넌 후의 세상에서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기 죽음을 경험한 자로서 오직 그리스도로 더불어 살기를 소원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더불어 사는 인생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지만 육으로 끝날 인생이 아니라 영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남아있어야 할 인생이기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사는 인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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