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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와 아멘 (신 27: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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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아멘(신 27:9-26)

사람에게는 누구나 경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경험'이라는 이 틀 안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이 내려지고, 지식의 전달이 이루어지고, 자녀를 교육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진리로 여기며 그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에게 '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면 커서 후회한다'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모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한 것이 어른이 되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후회로 다가오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가르칠 때도 자기 경험의 틀 안에서 가르치게 됩니다. 수십년 주부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며느리를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 뭔가 하면, 상대방을 자기 경험의 틀 안에 끌어들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보니 이렇더라'는 것을 타인에게 가르침으로 인해서 타인에게 자기 경험을 전달해주고, 자기 경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경험이란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럴 경우 경험과 경험이 부딪힐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끊임없이 경험과 경험의 부딪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대차이라는 것도 결국은 경험과 경험의 부딪힘입니다. 부모의 세대가 경험한 것이 다르고, 자식의 세대가 경험한 것이 다릅니다. 여기서 '누구의 경험이 옳으냐?'라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문제는 누구라도 자기 경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갈등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됩니다.

앞의 예를 다시 말씀드린다면,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후회한다'는 것은 부모의 경험이지 자식의 경험이 아닙니다. 지금 자식에게 있어서의 경험은 오락실 가고, 영화 구경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부모와 자식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경험을 고집하고 살아갑니다. 자기 경험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수십년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기도 모른 사이에 자기 경험이라는 굳건한 성을 하나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을 무너뜨리고 부정하는 세력이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서 막아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경험에서 굳어진 자기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축적된 경험이 원칙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과정에서 부딪힘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타인에게도 자기만의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경험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의 예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안하면 나중에 커서 후회한다'는 말을 틀렸다고 할 부모의 세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겪은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교 다닐 때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를 안해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후회는 누구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엇합니까?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후회란 현재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에 대한 불만족은 결국 불평과 짜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불평과 짜증은 불행을 낳을 뿐입니다. 때문에 '열심히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는 결국 잘못된 경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잘못된 경험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식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며칠전 신문에 전면 광고가 하나 실렸습니다. 내용은 '땡큐'라는 서비스에 가입을 하면 시내전화를 무료로 쓸 수 있고, 시외전화는 하반기부터 무료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건은 15초 동안 회사에서 제공하는 광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초의 광고만 들으면 시내, 시외 전화를 얼마든지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광고가 쉽게 납득이 가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것은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뭐든지 '그 대가가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입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공짜로 준다'는 자기 경험을 얘기하면 의심을 하게 되고 부정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 광고를 보지 않았다면 시내, 시외 전화를 무료로 쓸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광고 자체까지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공짜는 없다'는 자기 경험이 그 광고를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는 광고를 듣게 하는 것으로 이미 그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전화를 걸때마다 듣는 광고가 자연스럽게 머리에 남아있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중에 물건을 살 때 자연스럽게 그 광고의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는 판매전략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공짜는 없다'는 경험이 맞을 수도 있고, 또 '공짜는 있다'는 경험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15초의 광고를 듣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화비를 버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공짜로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경험이 옳은 것입니까? 공짜는 없다가 옳은 것입니까 아니면 공짜는 있다가 옳은 것입니까? 그 누구도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기 경험에서 나온 생각을 옳은 것으로 우기며 그 속에서 경험과 경험의 부딪힘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란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온 죄악의 현장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러분이 경험한 모든 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오직 자기 유익을 위한 삶에서 얻어진 경험을 과연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삶의 지혜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자기 경험'을 옳은 것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가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적 본성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경험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인데,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사랑과 자기 이기심에서 쌓은 경험을 교회에서 내세우고 주장하고 옳은 것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가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이기적 본성에서 나온 경험이기 때문에 자기 경험을 옳은 것으로 주장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모두가 죄악의 산물이요 더러운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경험 중에 '남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자'는 경험이 있었습니까? 세상은 '내가 유익을 얻었다'는 것만을 옳은 경험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얻어진 경험을 교회로 끌어들이면 결국 교회가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참된 경험은 오직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었던 경험, 바로 그 경험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에녹의 경험,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의 경험, 자기 뜻과는 전혀 다르게 야곱에게 축복을 하고 만 이삭의 경험, 하나님과 싸우다가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의 경험,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경험, 하나님께 불려 나와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의 경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나단 선지자로부터 죄에 대한 책망을 받고 침상을 적시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린 다윗의 경험, 오직 하나님이 말씀만 전하다가 죽음을 당한 선지자들의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의 경험, 바로 이러한 경험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경험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의 경험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경험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이 경험들만이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가를 가르쳐주는 참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도 바로 이 경험들이 우리들의 경험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들의 세상 경험들이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들에게 필연코 있어야 할 경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것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에 대해서 아멘 하라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 전혀 어긋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자신에게 유익 되는 것에 대해서 '아멘'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해서 복이 되어지는 것만 옳은 경험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경험과 정반대의 경험이 본문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선포에 대해서 '아멘'하라고 말씀합니다. '저주의 선포에 대한 아멘' 이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기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면 안됩니다. 애굽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약속의 땅에서 고집을 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저주에 대한 아멘 입니다.

요즘 교회를 보면 아멘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고 나면 아멘하고, 목사가 설교할 때도 아멘하고, 기도하고 나서도 아멘을 하는 사실 아멘의 의미를 너무나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설교하면서 우스개 소리를 해도 아멘을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멘의 뜻을 자기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고 나서 아멘 하는 것을 '내가 지금 한 이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는 의미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아멘이란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는 기대감이나 응답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어집니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저주가 부어진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기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험한 자가 '진실로 그렇다'는 아멘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을 해보지도 않은 자가 '아멘'한다는 것은 억지이고 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억지와 가식의 아멘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주에 대한 아멘은 실제로 저주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16절에서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를 경흘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든다는 말에 대해서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옳지만 세상 살다보면 소홀히 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발을 할 것입니다. 이 반발 역시 자기가 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바빠서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어쨌든 내가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경홀히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경홀히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을 경홀히 한 결과는 저주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아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온 후의 삶은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지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세에 대한 고라의 반역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고라 자손과 고라에게 동조한 자들의 멸망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자 염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14,700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 외에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에 복종하지 않을 때는 곧 저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로서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할 때 '아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요단강 이전의 세계와 요단강을 건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단강 이전의 세계는 각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세계입니다. 남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 '남 의지하지 말고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라'는 등의 말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단강 이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경험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저주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신의 억지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단강 이후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그곳에서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인간 경험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경험들이 모두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새로운 법칙만이 통용되는 세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아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에서 벗어나면 저주라는 것을 분명히 경험했고 알고 있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주에 대한 아멘은 '앞으로 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면 나에게 저주가 임할 것을 진실로 믿습니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은혜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아멘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12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을 12가지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12가지는 모두가 앞에서 말씀했던 것들에 대한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은혜의 땅에서는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은혜의 땅은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는 것을 철저하게 삶의 중심으로 하고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저주가 나에게 임한다는 것을 아는 땅입니다. 이것이 요단강 이전의 세계와 다른 점입니다.

요단강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할 때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넌 후의 약속의 땅의 다른 점은 저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무시할 때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다른점입니다. 하지만 요단강 이전의 세계, 즉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는 세계는 오직 자기 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은혜를 무시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모르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아는 땅입니다. 은혜의 땅이라고 해서 은혜만 있고 저주가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은혜의 땅은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이며 만약 이것을 무시할 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아는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선포에 대해서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그렇게 되어질 것을 믿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느 세계에서 살아가십니까? 자기 중심과 자기 사랑에서 체험된 자기 경험을 내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를 아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주를 아는 세계를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저주를 받는 것임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주를 아는 자가 과연 하나님과 이웃보다는 자기 사랑에 눈이 멀어 살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저주를 아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에 맞는 자는 어떤 모습이냐?'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할 일하며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저주를 아는 신자는 하나님이 저주 선포에 아멘을 하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자 하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약자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있는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경험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저주를 아는 자로서 결국 자신이 저주받을 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내가 받을 저주받아야 할 자였습니다'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은혜의 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주받아야 할 자가 살아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입니다. 오직 이 경험만이 진리입니다. 이 경험으로 살아가는 자는 이미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쓸데없이 세상 것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많이 가지기 위해서 애쓰지 않습니다. 무시 받았다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저주받을 자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와 함께 새로운 세계에서 은혜의 경험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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