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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 (신 28: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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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신 28:15-19)

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강렬합니다. 복은 곧 삶의 질적인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땀흘리는 인간으로서는 '복'이라고 하는 단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란 힘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은 곧 행위를 연상하게 합니다. 복이 되는 행위와 복이 되지 못하는 행위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복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 삼갈 것은 삼가고 행할 것은 행하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종교인이든 종교인이 아니든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거는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이점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복의 근거가 될만한 잘난 행위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실 때 인간이 복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애당초부터 하나님은 복의 근거로서 인간의 행위를 기준 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을 받는 원칙으로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인간이 세운 원칙을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 고집이 오히려 복을 밀쳐내고 있는 것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씀에는 관심 없이 복에만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고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설사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인간, 즉 죄짓기 전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을 보시고 복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존재에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되어진 천지창조 안의 하나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화가가 풍경화를 그릴 때 미리 그 머리 속에 그리고자 하는 풍경이 완성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산은 어떤 모양으로 그리고, 산밑에는 시냇물을 그리고, 시냇물 옆에는 자그마한 집을 그리고, 그리고 그 옆에는 장작을 패고 있는 농부를 그리겠다는 구도를 미리 완성하고 하나하나를 그려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화가의 그림에 그려지는 모든 것은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는 자기 머리 속에 구상된 그림을 위해서 하나하나를 자기 화폭에 담고 있을 뿐이지, 그림 속에 그려진 한 농부를 위해서 산을 그리고 시냇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완성하고 난 화가의 만족과 기쁨은 무엇을 향한 것입니까? 그림 전체입니까? 아니면 장작 패는 농부나 산입니까? 당연히 화가는 완성되어진 그림 전체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림 전체가 자신의 구도대로 그려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그림 속의 구성물 하나하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천지창조에서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하거나 귀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애초에 구상한 대로 완성되어진 그림을 보고 기뻐하는 것 같이 하나님은 계획한대로 완성되어진 창조세계를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의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이지 절대로 창조세계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은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은 구성물인 인간을 향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완성된 그 자체를 향해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란 말씀이 완성된 날입니다. 일곱 째 날을 복주신 것도 일곱째라고 하는 한 날이 복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곱 째는 하나님이 일하신 말씀의 완성을 바라보고 안식하시고 기뻐하시는 알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날을 바라보고 복을 주시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바라보고 복을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말씀을 바라보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오늘날 우리의 관심 역시 자연히 날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 말씀에 두어야 하는 것이 극히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말씀을 잘 지켰으니까 그 상으로 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마음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을 보호하고 지탱하고 유지하는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인간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말씀을 위해서 복이지 인간을 위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즉 사람의 질적인 향상으로 다가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삶의 질적 향상으로 기대하는 것은 결국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복받은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이 복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과연 복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그 어느 누구도 우리들이 기대하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고난과 죽음으로 연결된 삶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 때문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았다고 하는 모든 자들의 삶의 결과는 고난과 죽음이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들을 난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분명히 우리들의 상식으로 복과 고난은 함께 자리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고난은 복의 반대이며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벌로 여기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이런 상식세계에서 누군가가 '고난이 곧 복이다'라고 외친다면 분명 그는 미친 자가 아니면 전혀 다른 상식세계에서 온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마 5:10,11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핍박을 받고 욕을 받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는 분, 그분이 바로 말씀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신자란 말씀을 간직하고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수모와 핍박을 받고 거쳐야 할 사람입니다. 오직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은 저주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저주만이 주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저주를 하실 때에도 행위를 보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보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저주하실 때도 오직 말씀을 보시고 저주하십니다. 즉 말씀이 없는 인간을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8장에서 저주에 대한 말씀은 절대로 가볍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복에 대한 말씀보다도 무거운 비중을 차지한 채 기록되어 있습니다. 15-68절까지의 저주에 대한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저주라고 하는 커다란 그물이 우리에게 덮쳐온 느낌을 받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 또는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좋으심, 인자하심, 자비하심이라는 개념 안에는 저주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나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하신다는 개념에서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저주하시는 하나님이란 개념 안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인간이 저주를 좋아하겠습니까? 저주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신 28장에서의 저주는 무섭다 못해 소름이 끼치게 하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주 안에서 좋으신 하나님이란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28장에서 1-14절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15-68절까지의 말씀만 두고 생각할 때 과연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저주를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고 했으니까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말하면서 어떤 점에서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은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 아닙니다. 타협이 통하지 않는 융통성이 없는 분이고 오직 자기 것만 소중히 여기고 자기만 아시는 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리시는 분을 과연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에게 잘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 적인 시각과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과 저주에 대해서도 세상 적인 시각과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을 말하면서도 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저주를 말하면서도 저주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야단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나서는 그 자체가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사람들은 말씀을 십일조나 바치고 주일 지키고 구제하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그렇게만 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보다 더했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말씀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저주는 피하고 복은 받아보겠다고 '순종'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말씀은 인간에 의해서 정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편에서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것은 말씀을 정복해보겠다는 발상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내가 말씀을 순종을 해 보임으로서 저주도 자기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말씀을 지켜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켜온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지키고 무엇에 순종했습니까?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분 속에 먼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말씀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말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까? 산상수훈입니까? 과연 무엇을 가지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안타깝게도 현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합니다. 다만 일요일 되면 교회에 나와주고 헌금해주고 가끔 남 도와주고 교회 일에 참여해주는 것으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 66권의 그 많은 내용들이 겨우 그런 것에 순종할 것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면서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말하고 말씀을 모르면서 말씀을 말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말씀을 안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복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저주의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저주할 자리에서 저주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입니다. 인간의 문제점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저주를 피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 복을 받겠다고 설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율법으로 다가옵니다. 율법이란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율법에 순종한 자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우리를 죽음이라는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 나는 죽어야 할 자이고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는 고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면 지난 주일과 똑같이 말씀이 다만 저주로 교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바뀌어져 있습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 네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는다고 하고,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도 역시 저주를 받는 자리가 따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곧 저주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저주의 말씀을 대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당해야 할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말씀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눈이 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직한 실체는 저주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15-68절에서 말하는 저주를 하나하나 읽어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하나 감사와 자비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인이 병이 들어 고생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수군댑니다. 그러나 병든 당사자는 자기의 병을 통해서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돈도 명예도 다 부질 없는 것이고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병든 것은 과연 저주입니까 아니면 복입니까? 분명히 복입니다. 질병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통해서 진정한 복에 대해서 눈이 뜨인 것이 복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고 자비하심입니다.

저주라는 것은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고 심술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발견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에 율법을 기록한 돌을 세우고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저주를 이기고 등장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저주를 이기는 방법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밀어 넣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저주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의 피만이 저주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는 복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의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저주로 밀어 넣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저주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저주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만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저주 아래 있어야 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다시금 이스라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달은 사람이 인간이 죄에 의해서 죽어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양, 즉 메시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 3: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입니까? 목사 장로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자신이 저주받을 자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총만 바라보는 자입니다. 내가 저주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나 대신 저주 아래 있게 된 분을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주의 자리에서만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복이 아닌 다른 복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자리에는 저주받으신 예수님 대신에 세상 복을 나눠주는 예수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저주를 통해서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럴 때 참된 복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고 피흘리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을 아는 자는 자연히 세상보다는 예수님이 좋을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이 저주가 나오면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 위에 서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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