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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족 (신 28: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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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신 28:47-57)

믿음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삶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믿음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삶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가 입만 열었다 하면 강조하는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삶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경보고 예배드리는 것도 역시 삶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뭔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생각하기를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것을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하루 생활 속에서 '이것이 삶입니다'라고 특별히 내세울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특별히 '삶'이라는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모두가 삶입니다. 심지어 저녁에 잠자는 것까지 삶이며, 화장실 가는 것까지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루 생활 속에 특별히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기십니까? 숨쉬고 잠자고 밥먹고 화장실 가고 직장에 다니는 것은 그냥 삶이고, 그속에서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 등은 믿음의 삶으로 구분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밥먹을 때 기도 안하고 먹으면 그냥 삶이고 기도하고 먹으면 믿음의 삶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삶속에 그냥 살아가는 삶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일상적인 생활이라고 여기는 밥먹고 잠자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들은 믿음과는 별개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성경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가지고 믿음생활이라고 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담고 살아가는 삶은 주님과의 동행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부지런히 성경묵상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유다서를 보면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예언하면서 살았습니다. 즉 에녹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무엇을 해도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삶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염두에 둔 삶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면서도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즉 자신의 목적이 포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 심판이 담겨 있는 것,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연관시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요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달라는 기별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늑장을 부립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고 난 뒤 도착한 예수님을 보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한 말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오기 전까지는 주님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찾아와서 고쳐주는 분으로 바라봤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은 나사로가 병들고 죽어갈 때 그들과 주님은 별개의 관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나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고 조바심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는 말씀에 대해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이 대답을 삶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즉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던 그 자리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안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들의 삶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주님이 자신들의 삶이었다면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는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는 것도 주님의 뜻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담긴 삶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밥먹고 직장에서 일하는 모든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술먹는 자리에 참석했다면 그 자리에까지도 주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을 믿음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아플 때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있음을 알 것이고, 하는 일이 안되고 꼬일 때에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안할 때든 괴로울 때든 기쁠 때든 슬픈 때든 항상 변함없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삶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삶을 주님이 나의 삶 전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종교 행위나 착한 행위 등으로 생각을 해 버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일상적인 삶과 믿음의 삶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행동, 즉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착한 행동이나 종교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을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풍족하면 오히려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풍족해지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풍족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풍족하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갈 때가 가장 위험한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질 때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의 도움이 별 필요가 없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은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리기를 삶이 없이도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든지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든지 하는 판단을 섣불리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풍족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보다 부족하게 살고, 고통과 괴로움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내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나같은 것을 이렇게 풍족하게 살아가게 하십니까?'라는 감사가 진심으로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하루하루가 은혜로 가득 채워진 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풍족함과 순탄함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풍족과 순탄함에 대해서 당연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식이 점차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풍족에서 느끼던 감사도 역시 희미해집니다. 감사가 희미해지고, 은혜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의 권태입니다. 삶에서 감사와 은혜를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채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을 취미생활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내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라볼 때 내 신앙생활의 기쁨을 채워주고, 교회 다니는 즐거움을 채워주는 곳으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교회를 취미생활의 장소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내 삶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풍족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를 가지고 집안도 꾸미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교회도 찾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돈 만원이 없으면 죽는다고 할 때 그런 여유가 나오겠습니까? 자식이 순탄하게 커주고 말썽을 부리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식에 대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으로 인해서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식문제로 하나님께 나올 때는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다 없다에 관심 둘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 자식이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의 교회 생활이 배부른 여유에서 나오는 취미생활이 아닌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교회 생활을 일부러 부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과연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고 진짜 먹고살기 힘든 그런 지경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을 부르면서 교회를 찾아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8절에 보면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정도를 자기가 낳은 자녀까지 먹는 것으로 말합니다. 평소 아이들을 미워하고 성격이 난폭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4절 56절을 보면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라고 할지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현재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과연 지금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신28장에 나오는 저주의 경우를 모두 내 한몸에 집중시킬 때 과연 우리들이 질병과 실패와 궁핍한 삶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사랑이 있다 없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주하신다는 그 내용들이 단 하나라도 나에게 떨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데 여유를 두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르면서 두손들고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거나, 간절함으로 나온다거나,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긴박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유를 가지고 교회를 쳐다보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고 거기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여유를 가지고 교인들을 바라보니까 교인들에게 대해서 이런 저런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풍족함으로 인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게 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로 삼지 않습니다. 교회도 나에게 즐거움이 될 수 없고, 돈도 기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돈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그것들이 사라지면 내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힘들고 어렵다 싶을 때 항상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성경구절은 하박국 3:17-19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가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면, 신앙생활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와 함께 교회로 모이는 다른 교인들의 행동 때문에 잃어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내가 다니는 교회의 분위기나 다른 무엇인가 때문에 믿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지금까지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인품 좋고 사랑이 많은 성도 때문에 기뻐했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교회의 분위기로 인해서 즐거워했다는 결론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인과 교회로 인해서 얻고 있었던 기쁨을 다시 교인과 교회로 인해서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족함과 여유 속에서 나 자신의 종교생활의 만족을 채우려고 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풍요로움이 여러분의 덫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물론 풍요로우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풍요로 인해서 여러분이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풍요로움이 우리들의 덫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 28장의 하나님의 저주를 담고 살아가면 됩니다. 지금의 풍요를 즐기기 전에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을 때를 상상하라는 것입니다. 건강도 사라지고, 직장도 사라지고, 돈도 다 없어지고, 집도 없어졌을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됩니다. 과연 내가 그런 지경을 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상상하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주어진 것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고 나에게서부터 잘라내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풍요는 작은데 담겨 있는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만듭니다. 직장 잘 다니고 꼬박꼬박 월급 받으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보니까 하루 세끼 밥먹는 것 속에 담겨있는 주님의 은혜가 무시되어집니다. 그러나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하루 세끼 밥먹는 것도 힘들어질 때, 예전에 아무 걱정 없이 밥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가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투덜대는 것도, 교회로 모일 수 있다는 그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역시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예전에 마음놓고 교회로 모일 수 있었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데 담겨 있는 은혜를 풍요로 인해서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데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도를 안해서 그렇다. 성경을 보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잠들고 일어나는 그 잠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잊지 않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대하는 밥상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함을 잊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는 속에서 함께 하셨고, 내가 길가다가 넘어지는 그때도 주님은 함께 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작은데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풍요를 누려도 풍요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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