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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 (신 2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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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 29:1-13)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공짜로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곧 돈입니다. 결국 인간이 돈을 버는 목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취하여 소유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면 그것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주의 해결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집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 안먹고 안입고 안쓰면서 오랜 세월을 고생을 해야 합니다. 자식들의 성공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좋은 살림살이들을 구입하고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내 수중에 들어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단지 바라만 보고 포기한 채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나보다 많이 소유하고 넉넉히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세상의 불공평을 느끼게 됩니다.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없는 것에 불만을 내뱉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돌아볼 때 과연 앞서 말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는 것을 바라보고 불평을 하기보다는 있는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로 모이고 있지만, 사실상 그 마음은 믿는 자의 마음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싶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뭔가 세상에 대해서 또는 교회에 대해서 욕구불만으로 가득한 채 나오는 발걸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욕구불만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욕구 불만, 자식에 대한 욕구 불만, 남편에 대한 욕구 불만, 교회에 대한 욕구 불만, 목사에 대한 욕구 불만, 타인에 대한 욕구 불만, 이 모두가 사실은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필연코 욕구불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욕구 불만은 불평과 불만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구 불만은 여러분에게서 삶의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 모두를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에 평생토록 물만 부어 넣다가 끝나버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인생은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고 높은 권력과 힘을 가진 인생이었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삶은 맛있는 것을 먹어도 기쁨이 없습니다. 좋은 옷을 입어도 즐거움이 없고 사는 것 자체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족은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해도 좋은 옷을 입지 못해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족을 나 자신의 욕구불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다면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현재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만족이란 내가 원하는 것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 나올 수 있는 것인데,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돈이 있고 없고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분명 자기의 마음을 채워주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착하고 공부를 잘한다면 그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자식으로 기뻐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만족은 자식이 부모의 속을 썩이게 될 때는 사라져 버릴 만족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만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생에서 진정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은 평생을 욕구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가는가 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입니다. 신자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떨쳐 버리겠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 나오는 이유부터가 이미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욕구 불만의 해소를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욕구 불만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하는 일에 복을 달라고 애걸할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욕구 불만이 있는 사람은 자식을 잘되게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뭔가 자기의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성공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소망에 부응하는 것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러한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지금 이대로만 살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을 그러한 길로 밀어 넣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실패가 없고 어려움이 없는 인생을 살아오셨다면 그러한 생각을 하기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아오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불평과 불만으로 지내오셨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스스로 밀쳐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절에 보면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세우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이것은 언약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언약을 변경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언약의 내용은 호렙산이나 모압땅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을 모압 땅에서 다시 반복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친히 목격을 했습니다.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치시고 장자가 죽어 가는 엄청 난 재앙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더구나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사는 모두 물에 수장을 시켜버렸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친히 목격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분명 넘치는 감격과 흥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감사하고 구원을 찬양하면서 앞으로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의 이스라엘의 찬양을 보면 그들의 그때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보는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가는 기적을 목격을 했다면 과연 담담한 마음 그대로이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알았다. 이제는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는 각오를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이 두 번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렙산에서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나기 전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모압 땅에서의 언약은 40년의 광야생활후의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했던 어려움과 고통이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만 맛본 상태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40년이란 세월을 고생하고 난 뒤에 알게 된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더 진실 되겠습니까, 아니면 모압 땅에서의 언약이 더 진실 되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기적으로 마음이 떠있는 상태에서의 하나님보다는 40년 동안 고생하고 살아오면서 알게 된 하나님이 더 진실 되고 마음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이스라엘의 삶에 깊숙이 자리하는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서 깨달아야 했던 것은 5,6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며 능력이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떡도 먹지 못하고 포도주나 독주도 먹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세상의 음식을 맛보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늘의 양식인 만나로서 광야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배우고 깨달아야 했던 것은 '우린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광야에서의 40년이란 고통의 세월이 생각하기도 싫은 기간일수도 있습니다. '좀 더 편한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고생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지 모르겠다'는 불평과 불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그러한 원망과 불평 속에서 지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 말씀이 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오고 기적을 목격하고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내오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적을 베풀어서 애굽에서 건져내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바다를 갈라서 건너게 한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게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의 세월을 자기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통해서 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과연 광야 40년의 세월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까? 광야 40년의 고통의 세월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깨달으려고 하기보다는 나의 고통을 앞세우면서 불평과 불만을 내뱉은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고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시는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단지 내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만 내세우고 소리질렀던 삶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신 그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만 이스라엘이 깨닫는다면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광야에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나아온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언약과 맹세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함께 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함께 하지 아니한 이스라엘, 즉 자손 대대로 지켜져야 할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자는 복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저주라는 것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 28장의 저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내 힘가지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재앙을 받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임을 열방도 알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스라엘의 전부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복이고 생명이며 무엇이 저주이고 사망인가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아는 자를 찾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곧 하나님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안다고 하는 자는 많으나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가 드뭅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 힘들게 하시는지, 왜 고생하게 하시는지, 왜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2,13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맹세, 다른 말로 언약에 참여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삼으십니다.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에는 오직 어린양의 피의 은혜가 담겨있을 뿐입니다. 저주는 오직 이 피의 은혜에 참여하지 않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과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인생인지, 아니면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인생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러분을 풍족하게 하기도 하시고 힘들게 하게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은혜로 사는가를 판가름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모든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자기 욕구가 포기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워진 삶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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