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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와 성공 (신 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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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생각할 때마다 인간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도 같이 병행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같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만 생각하면 필시 인간을 최고로 여겨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겸손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어떤 일도 자신의 업적으로 가로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인생입니까?' 이렇게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묻고 자신의 인생을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겸손이며 하나님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만드시고 나서 팽개쳐 버리고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드실 때부터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점검할 때도 '하나님께 물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고 붙잡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사는 것이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점검했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묻고 살아갈 때 내 인생 깊숙이 세밀하게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아래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인생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발 앞에서 조용하게 무릎 꿇으면서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그 말 한마디가 신앙의 진수이며 겸손과 온유함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자기에게 유익 되고 편리한 대로 처리하면서 하나님께 묻지를 않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유리하지 않으면 뜻이 아닌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 중심으로 존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신은 거짓된 신이며 우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창조주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뭔가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 필요에 의해서지 만들어진 피조물의 요구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만든 자는 자신에게 필요 가치가 없어진 것은 언제라도 버려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일 저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무엇인가 뜻이 있어서 하신 일이라면 담담하게 따르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힘든 일을 겪으신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지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라는 반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인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 바른 삶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 역시 힘든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세밀하게 개입하시고 일하시는데 정작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 소경으로 귀머거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들의 인생에 개입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해서 행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피조물 중심으로 존재하는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중심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은 나의 소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에 세상 사람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기들의 인생을 도와주는 역할로서의 신을 생각할 뿐이지 신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자기 인생 속에 뛰어드는 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아예 우리가 지음 받고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내 인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세상에 펼쳐 내기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애당초 '내 인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인간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허수아비나 로보트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서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렇게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자기 주권이나 자기 권리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게 오로지 존재 이유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존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분석이며 결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삶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자로 살고 싶어하고 부자로서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하지만 부자로 존재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여건이 없는 것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높은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말해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부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신세를 한탄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근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인생살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자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되어져 살아갈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여건과 환경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되어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고 무엇인가 뜻이 있고 계획이 있어서 지으셨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포석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환경에서 벗어나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물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산다는 것이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자라면 이것이 신자로서 바른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을 때 다시금 이스라엘을 불러모으실 것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9장의 이야기와 연결 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29장에서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에 참예하여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29:12). 언약에 참예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이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구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농사도 짓지 못하고 헤매고 다녔지만 옷이 낡아지지 않고 신이 해어지지 않았으며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았던 것과 같이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인도하고 있음을 알고 언약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할 때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우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 위에 붓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내어서 다른 나라에 던져 버리신다고 하십니다(29:28). 그렇게 되었을 때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흩으신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겠다(30:2,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 쫓겨간 가운데서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마음에 기억 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다른 나라로 쫓겨가는 징계를 받았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이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기억하지 못할 때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셨던 일은 29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들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어떨 때 복을 받고 어떨 때 저주를 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언약에 참예 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믿고 살 때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 내어서 다른 나라로 던져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다른 나라로 쫓겨감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건너기전 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자신들이 쫓겨남을 당하고 다른 나라로 던짐을 받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기억함으로서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지 않는 인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도 잊어버리고 땅의 풍족함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왜 쫓겨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미리 말씀하심으로서 쫓겨났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이스라엘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것은 말씀을 잘 지키는 인간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새기는 인간이기를 원합니다. 실패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말씀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기 전에 말씀을 대하는 느낌과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다시 한번 말씀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은 자신의 실패를 낱낱이 고발하고 실패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노래하는 참된 이스라엘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말씀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대충 말씀을 지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실패한 자리에서,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만 모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참된 백성이며 구원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실패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마음에 두고 산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적당히 조절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종교적 행동을 높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2절에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3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8-10절까지의 말씀도 '돌아와 다시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을 행하면 복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쫓으셨는데 말씀이 기억나거든 다시 돌아와서 말씀에 순종하라는 이 말씀이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보고 행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11-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조건은 말씀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명령을 행하라고 할 때 우리는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행할까?' '할 수 있는가?'라고 고민하지만 하나님은 명령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의 입에 있으며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즉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뜻을 깨달을 수가 있고, 그 말씀이 마음에서 행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마음에 있게 되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을 두시고 그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말씀이 스스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이 내 마음에 있으면 율법 하나하나를 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율법이란 하나하나를 실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함유하고 있는 정신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이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것이 바로 말씀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자신의 삶을 세밀하게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과연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하나 만나도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져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삶에서 과연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비쳐지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들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은 말씀에 실패하고 있는 모습만 잔뜩 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 속에 말씀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게 되어 있으며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말씀을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점검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우리들의 삶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돌아볼 때 자신의 실패를 발견하게 되고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대해서 눈이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까? 말씀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입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자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시고 다시금 사랑 없음을 한탄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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