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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하심 (신 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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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심(신 31:1-13)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눈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이 떠진 상태에서의 신앙입니까? 우리들은 성경을 배웠다고 말하고, 성경을 알고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리스도에 대해서 띄어진 눈으로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교회가 전통을 말하고 교리를 말하지만, 그 전통이나 교리를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 검토하려고 애써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이니까 거부하면 안될 것 같고, 교단이 인정하고 있는 교리이니까 틀렸다고 말하면 안되고, 목사가 말한 것이니까 무조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눈 뜬 소경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도 없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이 띄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앙을 말하고 교회를 찾고 있는 이런 안타까움을 언제까지 느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신앙은 절대로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눈이 뜨인 상태입니다. 단순히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워서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알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단지 내 삶에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찾아가고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설명 자체가 우리들의 속에서 믿음을 일으켜주고 예수님을 신앙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들었다면 실제 자신의 삶에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라면 분명히 내 삶에서 나를 향해 말씀하고 나를 만나시고자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내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체험하고 만난 예수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과를 먹어본 사람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과를 먹어본 사람이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사과 맛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맛을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과 맛은 직접 사과를 사서 먹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과 맛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사과 맛에 대한 설명만 듣고 '나는 사과 맛을 안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맛보고 알고 있는 사과 맛이 아니라 단지 들은 지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과 맛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과 맛을 설명한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들었던 사과 맛을 그대로 말할 뿐이지 자기가 맛을 본 사과 맛에 대해서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과 맛은 최초에 설명한 어느 한사람의 말이 그대로 전해지고 전해질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사과 맛으로 알게 되고, 또 그것으로 사과 맛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 맛을 알기 위해서 사과를 먹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직접 사과 맛을 보고 자신이 느낀 또 다른 맛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밀쳐낼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사과 맛에 대한 설명만 인정하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제가 사과를 예로 들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이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한 말인가 하는 것은 다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이런 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이 띄어진 상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말씀드린 대로 머리에 세상이 말하는 예수는 존재하는데, 내 가슴에 살아있는 예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내가 들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을 전부로 여기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풍조나,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삶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풍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교회를 찾고 머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삶은 제멋대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것이 가슴에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버젓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길을 가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담성을 날마다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무 몰아 붙인다는 생각도 할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설교를 쓰다 보면 상대방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벼랑 끝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답답함은 저에 대한 답답함이며 한심스러움은 저에 대한 한심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이러한 답답함과 한심스러움이 저 뿐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상태와 문제점으로 느껴진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그리스도를 떠난 우리의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신다면 우리의 답답함에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생수를 찾아 같이 길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는 구절은 6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행하시고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시지 않을 것이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하신다는 구절 하나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버린다면 결국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결론 내려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함께 하는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머리와 머리를 통해서 전해 내려온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의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울 일이 있고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시는데도 얼마든지 괴로운 일들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괴로움은 우리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로 돌려버립니다. 슬픈 일들, 괴로운 일들, 울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내려진 징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서 잘못함을 범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6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이해가 바로 가슴이 살아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머리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소중한 것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이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한 혼란에 빠진 채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소중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소중한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알아서 공급하십니다. 때문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소중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단지 필요한 것일 뿐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부족하고 없다고 해서 낙심하고 슬퍼하고 살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방인의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고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지만 성경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아닌 소중한 것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결국 전혀 다른 하나님, 즉 우상을 찾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는다고는 하나 생명력이 없고 죽어있는 듯한 신앙생활이 연속되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것을 찾지 못하고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매어있고 갈급해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을 새롭게 재정립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아 가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 31장부터의 이야기는 모세가 자기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향해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을 전하고, 또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초막절이 되면 모여서 율법을 낭독하고 모든 백성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고, 평생을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모세로서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곧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는데, 모세가 이 말을 아무런 감정이 없이 했겠습니까? '여호와가 나에게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요단을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을 할 때의 모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라는 말도 늙어서 기력이 딸려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모세의 손을 떠나서 여호수아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의 할 일은 다 끝나게 됩니다. 할 일이 끝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나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말을 하면서 자신이 왜 요단을 건널 수가 없는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 가데스에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말씀을 어기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을 건너갈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자'는 결코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만 믿고 여호와만 의지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함께 하심과 전혀 다른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설령 모세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두 번쯤은 눈감아 주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는 말씀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와 같은 모습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은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가르치는 것이었지 모세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천국 갔느냐 가지 못했느냐는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모세의 잘못을 통해서 약속의 땅에 합당하지 않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만큼은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기를 원했고, 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 땅의 속성에 맞지 않는 모습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당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나는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었는데 지도자가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당신이 지도자냐'라는 야유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들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알고 있는 모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란 무엇을 보여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자신의 잘남을 보여주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못남과 부족함과 죄인 됨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이며 따라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어떤 사고방식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속에 있는 잘못된 사고방식, 잘못된 생각들을 끄집어내시면서 그러한 것들은 천국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니까 징계해서라도 버리게 하기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모세는 자신의 잘못으로 요단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요단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 사는지, 왜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괴로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근심과 걱정 속에서 헤매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씀의 비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되고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생명이지 않습니까? 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된 자는 자연히 그 마음이 강하고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자기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신자도 역시 자기 일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자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일들, 슬픈 일들, 죄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는 도구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천국에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말고, 징계해서라도 천국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40년의 고생의 세월을 마치고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쫓아내야 할 것은 가나안 민족의 사고방식,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와 같은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도 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고방식이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야 할 싸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현실이 약속의 땅이고, 오늘날의 천국에 대한 개념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면 안됩니다. 세상에서의 천국이란 생각하는 것처럼 살기 좋은 낙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싸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기 위해서 싸워야 했던 것 같이, 오늘 우리들도 가나안의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천국 같은 교회'라고 할 때 끝없는 환상 속에서 사이좋고 친절하고 분위기 좋은 교회를 연상하지만, 사실 천국 같은 교회는 가나안의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고 싸우는 교회입니다. 그런 것이 무슨 천국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천국은 살기 좋은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 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삽니다.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함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것, 병드는 것, 고통스런 일이 발생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난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질병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가난을 이기고 질병을 이기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가난을 통해서 보여주고 질병을 통해서 보여주며 고통스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일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힘듭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속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반복되는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담대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마음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지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짓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죄 가운데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변함없이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줄 수 있고, 여러분의 가슴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신앙으로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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