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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실체 (신 31: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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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체(신 31:14-29)

'인간에게 육체가 없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마치 영이신 성령님 같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육체가 없는 상태로 세상에 존재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물론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사실 저는 요즘 '육체가 귀찮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보면,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먹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을 다니고 장사를 하면서 육체를 혹사시켜야 합니다. 결국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육신을 혹사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육신을 가리는 옷을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돈을 벌기 위해서 고생을 합니다. 육신은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좀 더 멋있는 옷을 원합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생과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인생이란 오직 '육신'이라는 몸뚱아리 하나를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가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끌려가는 생각, 육신에 끌려가는 행동, 이것이 바로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육신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고생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신'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순간에 삶의 목표가 사라져 버립니다. 배부름이라는 목표가 사라지고, 멋있는 옷이라는 목표가 사라지고,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목표도 사라져 버립니다. 먹을 것, 입을 것, 편안함, 이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 인간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겠습니까? 인간의 존재 이유가 육신에 있었는데 그 존재 목표가 사라져 버렸을 때 분명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들의 인생이 육신을 위한 인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욕망이나 불만 등 모든 것도 역시 육신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고생을 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그 모든 이유도 역시 '육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이 없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의 인간의 삶은 육신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 말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육신이 없는 영의 상태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있으되 육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육신이 있다 해도 삶의 목표가 육신을 떠나 버린다면 그것은 육신이 없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즉 먹을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입을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내 육신의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삶은 분명 육신 때문에 존재하는 삶이 아닙니다. 육신이 있으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삶이었습니다. 이 삶이 안식이며 평안이며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안식, 행복이란 환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육신이 있으되 육신을 떠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떠난 삶의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창 1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찬 것 같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복되어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이것이 태초에 지음 받은 인간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육신은 단지 그 일을 위해서 주어진 수단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육신이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인간의 육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바램이고 의지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인간은 단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육신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목표를 자기 육신에 두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이 정복되어지고 다스려지고 팽창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으로 세상이 다스려지고 팽창되기를 바라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린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에 가치를 두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삶을 소비하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걱정이 생기고 염려가 생기며 불안함과 초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것이 육신과 연결되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모두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진정한 그 이유와 목표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반발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가 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자기 자신이 부인되어지기 때문에 반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육신이라는 단단한 줄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인생을 자기 육신을 위해서 살아갈 각오로 단단히 무장을 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라'는 말이 정상적인 말로 들려 질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왜 우리의 육신을 아무런 가치 없는 흙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육신과도 연관시켜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육신이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을 당할 때 편안함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연상하면서 '사랑'을 언급합니다. 내가 내 육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도 내 육신을 사랑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초부터 인간의 육신을 사랑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하찮은 흙으로 만드신 것입니까? 왜 우리가 귀하게 생각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나 희귀한 물질로서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애당초 우리의 육신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형상대로'와 '흙으로'라는 말씀입니다. '형상대로'라는 것은 형상이 사람을 지은 재료라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목표로 해서 지어졌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목표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습니다. 때문에 형상을 시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기능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상에 보이기 위한 존재로서 지어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 육신에 관심을 두고 결국 자기 육신을 위한 자기 일에 삶의 목표를 두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할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안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지상에서 최고의 윤리를 간직한 채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본래의 모습이 없는 이상 인간에게는 그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육신도 역시 썩어질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신이 있으되 육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 여러분은 이 인간의 본래의 삶이 그립지가 않습니까? 저는 이 삶이 그립습니다. 육신에 매어있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세상을 새털처럼 가볍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있다는 그 것 때문에 마음은 있으되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제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오늘도 주님을 찾을 뿐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당하게 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말을 여러분이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무시한다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배부르고 풍족하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배부르고 풍족하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겠습니까? 분명히 아니라고 도리질을 할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지금 배고프고 풍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못 섬기지 배부르고 편안하고 풍족하기만 하다면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어떻게 다른 신을 섬길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한 다른 신이라는 의미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지 않습니다. 배부르다고 다른 종교로 바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른 신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산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신이 되어 나를 지배할 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가령 돈을 생각해 봅시다. 돈이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즉 돈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에 의해서 지배를 당할 때 그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돈에 자신의 육신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돈이 신이 되어서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세상은 돈에 의해서 지배를 당합니다. 돈은 인간의 육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신을 편안하게 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구입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소유하고자 하고, 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양심도 팽개칩니다. 하나님도 팽개쳐 버립니다. 배부름과 풍족함을 맛본 이상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될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조차 망각해 버리고 오직 육신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버립니다.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기독교란 종교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뭔가를 할 때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배부르고 풍족해도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배부르고 풍족해도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가 있는가입니다. 즉 배부름과 풍족함을 포기하라고 하실 때 얼마든지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포기할 수 있다면 배부름과 풍족함에 매이지 않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배부르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삶에 매어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것은, 절대로 이스라엘의 편안한 삶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시면서 이 땅에서 망해야 할 존재는 누구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자는 누구인가를 온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신의 배부름과 편안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배부름과 풍족함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조차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로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어진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져서 다른 신을 섬길 것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져서 이방신을 음란히 쫓을 것을 미리 내다 보셨다면 아예 처음부터 배부름과 풍족함을 주지 않고 궁핍하게 하시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궁핍하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만 섬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궁핍함 속에서 지금껏 고생해온 자기 육신의 고생의 보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따른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이란 세월을 고생하면서 고생에 대해 보상을 받을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질 것을 기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자기 육신입니다. 즉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어려운 세월을 지나면서 배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셨기 때문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의 편안함을 꿈꾸고 있다면 이미 배부름과 풍족함에 매어있는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이 있는 이상 고생이 없는 편안함을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생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땀흘리고 수고하여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고생'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비록 우리가 볼 때는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는 고생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생을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생을 줄여보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고생을 줄이고 인생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40년간 고생했으니까 그 보상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주겠다는 의도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생 끝, 행복 시간이라는 환상에 젖은 눈으로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다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질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고생을 안하고 세상을 살고 싶어하고, 고생 없이 천국을 가고 싶어합니다. 지난주에 말한 대로 '무통분만의 시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오셔서 고생하시고 천국을 이루신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데, 교인들은 돈 때문에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하며 살아갑니다. 천국에 맞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들처럼 돈을 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달을 하고 있습니다.

잠 23:4-5를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합니다.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 되려고 애쓰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재물은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리는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면 고생을 하게 됩니다.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아껴야 합니다.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면 한푼 두푼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하고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돈은 결국 자신의 고생의 대가입니다. 고생의 대가로서 손에 쥐어진 돈이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돈을 자신의 전부로 여깁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 돈이 날아가 버렸다고 합시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물을 허무한 것으로 보시는데, 정작 교인들은 재물을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출석하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목사 역시 재물을 허무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돈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버렸습니다. 돈이 교회 되게 하고, 돈이 교회를 만들어 내는 세상입니다. 온통 배부름을 추구하고 풍족함을 목표로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외치니까 복음을 비웃고 거부합니다.

눅 16:14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라는 말씀대로 돈을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복음을 외치니 복음을 비웃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분위기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일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돈을 주신다는 생각들이 교회는 돈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교인들을 향한 말이고, 교회는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교인들에게 있는 돈을 교회로 옮기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이 음란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며 27절의 말씀대로 목이 곧고 패역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왜 굳이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십니까? 들어가 봐야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져서 이방신이나 섬길 그들임을 아셨으면서도 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가 배부르고 풍족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부르고 풍족한 환경으로 집어넣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배고플 때는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 배부르고 풍족하니까 이제는 이방신을 섬기고 음란히 행하는 죄가 가나안 땅에서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바로 내 육신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할 일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원수이고 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교회 세우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열심을 기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교회를 세우고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뭔가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가 인간의 일로만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가운데 행해지는 행위는 자기 찬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지만 육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붙들려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도 우리를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는 것만큼 편한 것이 없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육신의 편안함과 배부름을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생 자체를 포기한 자의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육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되는 듯하다가도 안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이지만, 어쨌든 육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항상 배부름과 풍족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참으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서 미워하십시오. 열심히 미워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내 머리가 되셔서 내 모든 것을 주관해 주기를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내가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것이고 쓸데없는 육신에 애착을 가지기보다는 천국에 애착심을 가지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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