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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을 아는가 (신 3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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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아는가(신 32:1-12)

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사람 취급을 안해왔습니다. 지금은 개인주의 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는다거나 은혜를 끼치는 일들이 줄어들었고, 또 남에게 은혜를 끼치며 살아갈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배은망덕이라는 말조차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옛날에는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그것을 인간다운 모습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 사랑'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받은 은혜까지 등을 돌리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지 말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짐승은 자기를 키워준 주인을 물지 않는 법인데 인간은 그렇지 못함에 대해서 꼬집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받은 은혜를 중요시하는 말로서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받은 바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다움의 모습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옛말을 종합을 해보면, '인간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알고 또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자에게도 등을 돌려버린다. 이것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다. 결국 인간은 옛날부터 사람다움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잊어버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자에게도 등을 돌려버릴 만큼 악한 것이 인간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야 말해서 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은혜를 은혜인줄 아는데서 비롯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은혜로 고백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참 쉽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백지 한 장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답을 쓰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그 백지를 메워 나가겠습니까? 여러분이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기껏해야 지금 여러분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얄팍한 지식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것 말고 덧붙일 사랑이 있습니까? 덧붙인다고 해봐야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그것이면 됐지 또 뭐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는 많은 물음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어떻게 된거요?'라고 묻는다면, 또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북한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은 뭐고 소말리아에서 배고파 죽어 가는 어린이들은 또 뭐요?'라고 묻는다면 과연 여러분은 그러한 사회적인 모습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연결지어 대답하겠습니까? 설마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벌받는 것입니다'는 무식한 말로서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으시겠죠?

사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고 느끼지 못하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비적인 현상으로서의 만남과 체험과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적인 현상과 기적과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 안에 거하도록 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신비적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만났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기적으로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변화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기적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을 하기는 했지만, 배가 고프자 하나님을 원망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만나고 체험했던 하나님은 단지 기적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적이 사라지고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닥치게 되었을 때 인간의 본연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며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도와주려면 도와주는 쪽으로 일관되게 진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쩔 때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애굽의 군사를 바다 속에 몰살시키면서까지 도와주시다가, 또 어쩔 때는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이방 군사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시다가 또 패배하게 하시는, 도저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불안할 때 과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이거다'라는 확고한 답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내가 잘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못하면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말도 안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유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부르는 노래이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본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0-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셨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어디에서 만나신다고 하십니까? 놀랍게도 황무지이며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호화로운 호텔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칠고 척박하고 살기 힘들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황무지에 우리를 만나십니다. 짐승들이 부르짖는 무서운 곳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편하고 좋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한 우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황무지,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내가 너를 지킨다 내가 너를 호위한다 내가 너를 눈동자 같이 보호한다'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편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은 '내가 너를 편안한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너를 크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성공하게 할 것이다'는 말로써 신자들을 유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와서 날개를 펼쳐서 다시 받아 올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즉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는 데도 어미로서의 뜻이 있다면, 파닥거리고 떨어지는 새끼를 못 본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날면서 모든 시선을 새끼에게 집중합니다. 그런 새끼가 있는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어미가 원하는 새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어미의 사랑은 새끼에게 먹을 것을 날라주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을 날며서 새끼를 지키고 보금자리를 흔들어 버리는 모든 것까지 포함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새끼가 하늘을 날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미가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자기를 떨어뜨리는 것에 불평을 하고 단지 어미가 먹이를 물고 날아와서 자기 입에 넣어줄 때, 즉 자기 입에 뭔가 들어가는 것이 있을 때만 사랑을 생각한다면 과연 어미의 사랑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수준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수준이 꼭 이와 같습니다. 마치 하늘을 날면서 그 시선을 새끼에게 두고 바라보고 있는 독수리처럼,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독수리처럼 하나님도 하늘에서 그 모든 시선을 우리에게 두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또 때로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떨어뜨리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데, 이 모든 것이 사랑인데 정작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내 입에 뭔가 들어오고,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을 말하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안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평소에는 부모님의 사랑은 생각지도 않고 부모님의 입장을 생각하기는커녕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살아가다가 '어버이 날'이라고 해서 꽃 한 송이 달아 주고 선물 하나 하고서는 마치 부모님을 사랑하고 사랑에 보답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살아가다가 주일 되면 예배하고 헌금 드리고 절기에 감사헌금 하는 것으로 마치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사랑에 감사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랑을 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철없는 아이들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10살 때 느끼는 것이 다르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느끼는 것이 다르고, 인생을 살면서 쓴 맛 단 맛 다 체험했을 때 느끼는 사랑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겨우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게 되었을 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느끼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것만큼 은혜도 깊어지고 은혜를 은혜인줄로 알게 되었을 때 사람 또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는 옛말은 비록 인간 관계에서 소중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안다면 과연 아는 것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수준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경우에 은혜를 말하고 감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취직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학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큰집으로 이사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등등 교회에 바쳐지는 감사헌금의 명목들이 대부분 이런 종류입니다. 모두가 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받은 것을 은혜로 알고 사랑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받아서 기분 좋고 기분이 좋아서 고마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속에 이러한 감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날마다 은혜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는 신앙인이 아니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사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신앙인들이 이런 수준의 감사와 사랑에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받아서 기분 좋고, 기분 좋아서 감사하는 수준의 믿음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서 기분 좋고 감사하는 수준이라면 받은 것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취직시켜 준 것이 은혜라면, 취직이 안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이 은혜라면 건강하지 못하고 병들었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가는 것이 은혜이고 사랑이라면, 사업이 망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래도 그 은혜와 사랑이 유지되겠습니까? 필시 은혜와 사랑은 원망으로 뒤바뀌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사랑은, 받아서 기분 좋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독수리이고 우리는 그 새끼라는 관계에서 얻어지는 사랑입니다. 독수리가 새끼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늘을 날면서 새끼를 주시하고 있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입니다.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 마음 깊숙이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4절에 보면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고 말합니다. 공덕이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완전하신 일이기 때문에 불공평이 있을 수 없고 거짓이 있을 수 없고,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법을 무시고 뇌물을 받으며 거짓과 불공평으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목사라고 해서 치우치지 않으시고, 헌금을 많이 했다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고,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인간을 보고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단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있을 뿐이지 잘하고 못하는 것에 의해서 구별되는 백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하시고 공평하시고 진실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지금껏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우리의 행위를 조건 삼아서 받고 못받는 것을 계산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5절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은 반석입니다. 흔들림이 없고 변하는 것 없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내 손에 쥐어지는 것, 내 입에 들어오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하는 것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면서 살아갑니다. 손에 쥐어지는 것으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수준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것으로는 안심을 하지 못합니다. '지키신다면 내가 잘살아야지'라는 불평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사랑에 깊이 빠져들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6절에 보면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고 말합니다. 지금 신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얻으시고 지으시고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얻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올 수 있었음을 잊어버립니다.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시고 세우셨기 때문에 성령 안에 세움 받은 자로서 주님을 찾을 수 있었음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매무지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세상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얻으시고 지으신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세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자녀로서의 참된 마음인데 오늘날 우리는 이 마음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자녀라고 하면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안다고 합니다. 왜 이같이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 교회 지어바치고, 돈 바치고, 몸바치고, 시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바치는 것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행동도 아니고 정성과 노력도 아닙니다. 다만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얻으셨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나를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리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를 아는 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것보다는 내가 받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은혜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는 사람이 아닌 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대는 아버지를 상실했습니다. 오직 자기만 살아있는 세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든 그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관심거리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들의 힘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은혜를 왜 그렇게 보답하는 것입니까?

신앙생활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못하면서도 아버지께 자기 신앙을 부탁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상실한 신앙인입니다. 물론 이것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단지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명목상의 신앙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또한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굳게 지켜주시는 사랑으로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를 지키시고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보금자리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금자리를 굳게 붙들고 그 속에 안주하려고 할 때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떨어뜨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얻으시고 하나님의 세계에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 오늘도 독수리가 새끼 위에서 그를 바라보며 날고 있는 것처럼 우리 위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보금자리를 흔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새끼를 못본체 하지 않으시고 날개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뭔가 극적인 순간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감격적인 경험을 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에 시들해지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루 세끼 먹으면서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은 과연 누구 지켜주고 보호해준 결과입니까?

그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도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결과입니다. 말씀을 들을 줄 알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로 교회에 모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얻으시고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이 사랑에 시들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왜 이같이 보답하느냐?'고 외치십니다.

사랑을 아는 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는 신자입니다. 세상여건 때문에 불평불만 하지 말고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설령 보금자리가 흔들려서 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오늘도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외칠 것이고,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기적이 일어날 때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 그것으로 이미 복된 자이고 자유자이며 세상이 두렵지가 않은 자입니다.

우리 함께 이런 신자로 살아가기를 원합시다. 마음은 원이로되 그렇게 되어지지 않을 때 낙심만 하지 말고 하늘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그 부탁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여러분을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황무지에서라도 광야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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