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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의 종말 (신 32: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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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종말(신 32:20-30)

신앙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행복이란 '어떤 사람이 되어졌느냐?'에 그 근거를 두고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졌느냐?'는 문제는 곧 '마음의 변화'를 묻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마음의 변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마음의 변화를 어떻게 말합니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마음의 변화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지혜'라고 부릅니다. 결국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그 근거를 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의 근거를 소유에 두고 있습니다.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찾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도 소유로부터 오는 행복은 일시적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소유를 해봤기에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일 줄로 압니다.

만약 소유함으로서 행복해진다는 말이 진리이고 사실이라면 '부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불행하다'는 말이 세상 속에서 만고 불변의 법칙으로 통용되어져 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유함으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세상에서조차도 '부자는 행복하다'는 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유하기를 원하면서도, 소유하면 뭔가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면서도 '부자는 행복하다'는 말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소유 자체가 행복이 아님을 알면서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소유하면 세상을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유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부자는 행복하다'는 말이 잘못된 것 같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말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소유에서 오는 행복을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근심 걱정은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소유가 없으면, 즉 무소유로 살아가면 근심 걱정의 원인이 사라지니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를 폅니다. 이 말이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소유가 없이 무소유로 살아간다면 분명 인간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인간 가운데 과연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집 없고 돈 없다고 해서 무소유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세계에도 자기 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좀 더 따뜻하고 편한 장소를 먼저 차지하고 그것을 자기 자리로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땅도 아니면서 먼저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으로 자기 영역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옛날 완행열차라는 것이 있을 때는 지정 좌석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먼저 앉으면 목적지까지는 내 자리로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개찰을 하면 바쁘게 뛰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창문으로 자신의 보따리를 집어 던져 놓고는 그 자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광경입니다. 내 보따리가 먼저 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목적지까지는 내 소유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소유로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앞의 제 말에 대해서 부정을 하신다면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유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끊임없이 자기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무소유로 산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무소유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단지 직장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산 속에 홀로 틀어 박혀서 산천을 벗삼아 세상을 잊어버리고 산다고 해도 '자기'라는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자기'라는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신을 돌아보고 비교하면서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 빈곤감을 느끼면서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이 아닙니까?

그래서 인간은 소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을 소유와 무소유의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의 변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소유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의 변화, 즉 지혜가 있음이 행복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예배드릴 때마다 기도하면서 입버릇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반복합니다. 그 말만 들으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같고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날마다 살아가는 삶이 실제로 기도처럼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입으로는 예배 순서에 따라 찬송가 몇 장 몇 장을 부르면서 은혜가 된다고 하면서도, 과연 우리들의 삶은 찬송가처럼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헌신으로 헌금을 바친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우리 삶의 얼마만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고, 예배와 생활이 나누어져 있고, 말씀과 행동이 각각 구분되어 있음을 더욱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입에서는 감사가 나오지만 삶은 실제로 행복하지 못하고, 헌신은 하면서도 하루하루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쁨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행복을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종교의 병폐이며 예배 중심적인 신앙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근거로한 마음의 변화가 없이 행복과 기쁨의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서 헌신을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며 시시때때로 빠짐없이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그것이 과연 여러분에게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까?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곧 행복하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자는 소유가 있고 없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마음의 변화를 말할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등등 복있는 자의 모습은 모두가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내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음으로서 마음이 변화될 수는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지혜가 있음으로서 변화된 마음인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라고 말하고, 29절에서는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 함께 하심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배부름과 풍족을 얻게 하십니다. 배부름과 풍족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15절에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게 되자 하나님을 발로 찼다는 것입니다. 배부름과 풍족함에 이르게 되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이 여겼다고 합니다. 소유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증거물로 누어진 것인데, 그렇다면 소유가 있음으로 인해서 더욱 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만 찬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소유 자체를 사랑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진노를 격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점이자 오늘 우리들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얼굴을 숨겨 버리고 그들의 종말이 어떠한지 보시겠다는 것입니다(20절). 그 종말의 모습이 21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29절에서 이 종말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종말은 세상의 종말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곧 나 자신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종말을 생각할 때는 '세상이 망하는구나'라는 것으로 그쳐버릴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망하는 존재다', 즉 자기의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의 종말을 깨닫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배부름과 풍족함에서 여호와를 발로 차버리고 하나님을 버리며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진노를 격발하게 하였다면, 오늘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소유가 풍족한데 여호와를 왜 믿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배부르고 많은 것을 소유한 자로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고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데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종말은 곧 우리의 종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종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패역하고 무신한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혜란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끝이 나고 내가 어떻게 끝나는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 있는 자입니다. 이 지혜가 있음으로서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종말에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종말을 깨닫고 자기의 끝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나에게 끝까지 남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에 끝까지 미련을 두고 붙들려고 합니다. 소유가 사라지는 것을 아까워하고 아쉬워합니다. 또 남보다 적은 소유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하고, 적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이것이 이미 행복과 기쁨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아무리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의식으로 시작해서 의식으로 끝나는 것이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자신이 바쳐지는 것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지혜 있는 자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진노를 격발케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이며,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불에 의해서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에 이르기까지 망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종말임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이것이 정녕 우리들의 종말이라면 우리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과 비전이라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말하고 비전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발로 차버리는 것이고 배반하는 것이고 질투를 일으키고 분노를 격노케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종말을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종말, 자기의 종말 모두를 잊고 살면서 열심히 자기 소유를 위해서만 땀흘리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종말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못하고,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우쭐거리려고 합니다.

종말의 자리에 자기를 세워 놓고 보면 사실 남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종말은 모두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천국이냐 지옥이냐로 구분될 뿐이지 천국 안에서 또 다른 비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서도 비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이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사로 일한 사람은 평신도보다 더 많은 상을 받고 봉사 헌신을 많이 한 사람도 역시 상을 받을 것이고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역시 큰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서 천국을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천국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교가 있는 자리에 행복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종말은 모든 자가 동일합니다. 배부르면 하나님을 차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자신의 소유를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에는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태워버리시겠다는 종말을 피할 인간이 없고,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뭔가 다른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을 보게 되면 여러 가지 차별과 비교 속에서 수많은 계층의 인간으로 구분되지만, 종말을 생각하고 보게 되면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기 있고 얼굴이 잘생긴 탤런트와 나 자신을 비교하면 여러 가지 차별이 발생하지만 종말 앞에서는 동일합니다. 재벌과 가난한 자를 비교하면 분명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 앞에서는 오직 한가지만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 받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종말 앞에서는 무엇을 했다 안했다 가졌다 못가졌다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단지 '너는 하나님만 사랑하였느냐'를 물을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말에 묻는 것은 '주를 사랑하였느냐' 이것 하나입니다. 그런데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기보다는,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졌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종말을 생각할 때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본질을 본질 그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의 직위나 소유의 정도, 또는 행위를 덧붙여서 바라봅니다. 예를 들어서-1이 있고 + 1이 있다고 할 때, 이 둘은 똑같이 1입니다. 그러나 +가 붙어 있고-가 붙어 있음에 따라서 1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 앞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종말은 1이라는 숫자에 붙어있는 +나-를 떼어버립니다. 즉 1만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저를 '신 목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서는 '○ 장로' '○ 집사'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목사와 장로 집사와의 관계에 차별을 둡니다. 즉 1만 보는 것이 아니라 + 와-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국 +1과-1이 서로 다르듯, 목사와 장로 집사를 서로 다르게 구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 목사와 장로 집사라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만 인간만이 남을 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선행을 베풀었다고 해도 종말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죄인인 인간만 남을 뿐입니다. 죄인인 인간 사이에 비교할 것이 있고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자기 발견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발견했을 때, 목사도 장로도 의미 없는 것이고 오직 망해야 할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만이 의미 있는 분으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종말을 생각하는 지혜로 인해서 변화된 마음인 것입니다. 이 마음의 상태가 곧 행복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본질을 발견했을 때,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그 의미가 새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종말을 잊어버리고 종말에 대해서 안심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종말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이 종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전도를 수천명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수그러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 때문에 더욱 더 질투를 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교회에 올 때는 자기 종말을 체험한 자로서 와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을 보여줘야 합니다. 종말에 목사도 남지 않고 장로도 남지 않고 재건교회라는 교단도 남지 않고 웅장한 예배당도 남지 않고 나의 선행도 남지 않고 봉사하고 헌신했던 내 믿음도 남지 않고 오직 남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을 부지런히 보여주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종말을 체험한 신자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종말 앞에서 태워지고 사라질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한다면 십자가뿐입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남의 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내것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마음도 없는 이 상태가 바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삽시다. 내안에 십자가가 있다면 종말에 남을 것은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그것 하나 바라보고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신자이며 마음이 변화된 신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말에 남아있지 않는 것을 미리 팽개쳐 버려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각자 다르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좋고 나쁨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 이것은 나쁜 것이라고 구별하지 말고 작으면 작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그 역할이 있고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종말에는 다 사라지고 없는 것들인데,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세운 기준이고 그 기준 역시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살 때, 우리는 너무 욕심을 부리며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것에 목숨 걸고 집착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종말은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세상의 흔적들을 훌훌 털어 버리게 할 것입니다. 다 털어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금 현재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넘치는 은혜로 자리할 것이고 그것이 곧 여러분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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