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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 (신 32: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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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안에서는 기독교를 참된 종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신이고 나머지는 모조리 우상이기 때문에 유일하신 참 신을 섬기는 기독교만 참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밖을 향하여 외치는 종교적 아집이요 고집일 뿐 세상은 결코 기독교만 참된 종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같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 볼 때 도대체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르는 신의 명칭이 다를 뿐, 추구하는 것이나 목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자기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기독교를 향해서 '그래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만 참 신이고 너희들의 기독교만 참된 종교다'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스스로 참된 종교라고 말하면서 참된 모습은 떼어 내 버리고 단지 종교로서의 모습만 열심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도 모를뿐더러, 아예 처음부터 참된 것에는 관심 없이 단지 종교의 옷만 열심히 껴입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몸은 비쩍 말랐는데 옷을 너무 껴입어서 겉으로는 비대하게 보이고 몸조차 마음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라고 보여집니다.

기독교가 진심으로 참된 종교로서 세상에 보여지기 위해서는 '종교'에는 관심을 끊어버리고 오직 '참'에만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 참된 것이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참되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거짓된 것임이 기독교를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기독교라고 이름하는 단체가 세상의 거짓을 드러내고 참된 것, 즉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가 지금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며, 우상을 섬기는 거짓 종교라고 매도하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눈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는 한패로 여길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고 안믿는 것만 다를 뿐,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 '역시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어서 그런지 우리하고는 생각하는 차원부터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를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참된 것, 즉 진리만을 좇아가는가 아니면 참된 것을 외치기는 하지만 여전히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종교를 추구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고 난 뒤에 '기독교만이 참되다'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라는 종교의 참됨을 증거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참된 것, 진리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기독교를 참된 종교라고 말하는 그 허구성을 깨닫자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 자신 조차도 모르면서 기독교를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내 것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 기독교의 잘못이라면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물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를 같은 물에 있게 하신 것은 같이 놀아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놀고 있는 물 자체가 멸망의 자리요 심판의 자리임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같은 물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으면서 아무리 진리를 외치고 복음을 외친다고 한들 과연 진리가 진리로서 복음이 복음으로서 드러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진리의 훼방자, 복음의 원수는 기독교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하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진리의 훼방자이며, 복음의 원수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란 성실한 믿음과 착한 성품 행동을 가진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도 성실한 믿음은 존재하고 착한 성품과 행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주장하거나 진리의 모습으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신자란 자신의 삶과 죽음에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삶과 죽음을 그리스도께 맡긴 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고 죽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아직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면 내가 해야 할 사명이 다 완료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같은 물에 있어도 같이 놀지 않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세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한분이신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보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없이 우린 감히 '신자'라는 말을 언급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하든 교인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여러분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 포함될 참된 신자만큼은 여러분 마음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려면 여러분의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자입니다'라는 이 고백 한마디는 '나는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닙니다' '나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하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 삶에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갈 때 '살려달라'고 외치면 달려와서 살려주는 꼭두각시 같은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안의 신자가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신자 역시도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살아갈 때는 내 힘으로 살고 있다고 여기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죽어갈 때는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참된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는 기독교도 아니고 신자도 아닌 모습입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살려주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낫게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상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분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낭당의 고목이나 길가에 서있는 장승처럼 내 밖에 서 있는 신이 아닙니다. 내가 필요할 때 찾고 달려오는 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영으로 계시면서 나의 주인으로 역사 하시는 분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나의 주인으로서 영으로 계시는 분을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것으로도 형상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재를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보여 봐라'고 하는 것도 영으로서 우리 안에서 우리 주인으로 내주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영으로서 우리 안에서 내주 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곧 내 삶의 주체인줄로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밖에 서 계시는 장승처럼 여겨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가 주인 되어서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죄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심으로써 살 수 있는 존재인데 자기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어리석음의 인생에서 남는 것은 허무와 괴로움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신다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라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도 죽이시는 것도 상하게 하시는 것도 낫게 하시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살고 죽고 병들고 낫는 삶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사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살아올 때 그들이 목마르고 마시고 주리고 배부른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배후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주리게 하신 것도 이유가 있고 누구도 맛보지 못한 만나를 먹게 하신 것도 이유가 있으며 목마르게 하신 것도 그들을 낮추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함이 곧 인간의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이 어리석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현실에 집착해서 잘되면 교만하고 못되면 불평과 원망을 내뱉으면서 항상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오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분과 분명한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분께서 내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계시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내 인생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만큼 돈을 모았고 오늘날 이만큼 소유하게 되었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열심히 일하고자 해도 건강이 없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절약하고 아껴서 돈을 모은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신다면 돈은 여러분의 수중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직장에 다니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열심히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하신 것이며, 얼마나 모았든 모을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게 된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배후에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아놓은 것이 내 손에 빠져나가고, 있던 것이 사라져 버리는 모든 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그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시는 일임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남들보다 어렵게 살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현실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좀더 많이 벌어서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꿈꿀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것이 멸망당한 자들의 모습이었음을 아십니까? 눅 17:27-29절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나 롯의 때의 특징은 종말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도 몰랐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신자도 역시 얼마든지 시집가고 장가들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고 팔고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다른 점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게 된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고, 사고 파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으며, 집을 짓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주라고 일하신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집가고 장가가며 살고 팔고 집 짓는 것을 현실로 생각해 버리고 그 현실로 기뻐하고 즐거워 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고, 종말을 잊어버린 것이며,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멸망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32-33절에서도 그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정신을 가지고 자기들의 소득물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같은 물에서 같이 놀아버리는 것입니다. 종말이 어떠하며 하나님이 심판이 있고 진노가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 대해서 원수를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집사고 자식 가르치고 성공하는 것을 현실로 여기지만, 그래서 좋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서 좋은 현실을 살아가기를 꿈꾸지만 신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하나님이 배후에서 일하시는 것, 그것을 현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내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가짜이며 무대에 세워진 세트에 불과하고 진짜는 내 배후의 세계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것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내가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죽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볼 것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이지 내가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 엉망이고 이러 저런 일들이 터질 때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뒤죽박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엉망이든 잘되든 세상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분명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고, 그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이것을 모르고서 신자라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음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밥을 먹어도 자기 일을 위해서 먹을 것이고, 직장을 다녀도 자기를 위해서 다니게 되고, 돈을 모아도 자기를 위해서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종말을 모르는 노아의 때의 모습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플 때 누가 아프게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갈 때 누가 살리고 계시는지 알고 밥을 먹어도 누가 먹게 하시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참다운 것으로 좇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다면 그는 불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일하실지 그 마지막이 무엇인지 내가 왜 살고 있으며 내 배후에 누가 계시는지를 모른다면, 그는 비록 교회당을 찾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종교인은 될지언정 결코 참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40-42절을 보면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 현실로 여기고 세상 것으로 웃고 울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세상에 대해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전쟁을 하신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기에만 바쁘고 편안하게 사는 것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지 예수님 편에 서서 싸우는 삶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같은 물에서 같이 놀기에 바쁘다 보니 복음이 아닌 것과 싸우려고 하지 않고 타협이라는 편한 길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사단에 붙들려서 죽음을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실제입니다.

41절에 나의 대적에게 보수(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내 힘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 편에 서서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리가 귀하지 않고 복음이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힘들게 해서까지 진리 편에 서야 할 이유가 없고 복음만 고집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이 눈에 보이는 현실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자기 꿈을 실현시켜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지 진리니 복음이니 하는 것에는 이미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들과 싸우실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참된 것을 찾기보다는 보이는 것에서 참된 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진리와 복음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뭔가가 손에 주어지면 내 힘으로 여기고 우쭐거렸습니다. 있던 것이 사라질 때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생각조차 안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죄밖에 아는 것이 없고 죄속에 파묻혀 살아온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 속에 주님이 오셔서 사단과 싸우십니다. 사단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세상이라는 현실에 대한 헛된 망상을 깨드리심으로서 우리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발생하는 전리품이 바로 주님의 백성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주님의 백성은 주님만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전쟁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음을 감사하고 주님만 가장 귀한 분으로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배후에서 나를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 위해서 내 속에 들어와서 헛된 꿈을 부숴뜨리는 하나님의 실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배후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왜 전쟁을 하시는지, 왜 우리로 하여금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상하게도 하시고 낮게도 하시는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역시 하나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여러분의 인생과 현실은 잘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한 인생이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 일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참을 아는 신자이고, 같은 물에 있되 같이 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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