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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1 (신 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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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종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만을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서 1: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라는 말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보는데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찌른 자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세상의 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그 죄로 인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십자가의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지금은 괜찮은데 나중에 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십자가가 존재함으로서 세상의 종말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종말을 잊어버리고 다만 피흘리신 불쌍한 예수님만 상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기 좋은 낙원으로 데려다주는 십자가만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눈물이나 흘리고 있으라고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항상 반역만 하고 날마다 예수님을 찔러 대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낙원으로 인도하려고 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십자가'를 말하고 '주님의 고난' 운운하면서 눈물 흘리다가, 돌아서면 주님과는 남남이 되어 버리고 세상을 향해서 미소짓고 달려가는 자들을 복주기 위한 십자가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세상은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하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는 증거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새롭게 인식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희망을 두고 열심히 수고하고 땀흘리면 내가 원하는 낙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그러한 모든 수고와 땀이 헛된 것이라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세상에 대한 초조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으로 인한 초조감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들을 자세가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초조감이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현재 자기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것에 대한 초조감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장래 문제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초조해 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해서 초조해 한다면 그 이유는 뻔합니다. 자식이 현재 공부를 못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이지 못할 때 '저게 나중에 뭐가 되려고 저러나'라는 초조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직장이나 사업 공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지 못함으로서 초조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초조해지는 것은 세상을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십자가를 걷어버리기 때문에 초조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우리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 세상은 2000년이니 뭐니 하면서 21세기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지만, 인간이 아무리 땀흘리고 노력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해도 마지막 때 하나님은 '너희가 주를 어떻게 대했나'를 물으실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초조해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속죄 제물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있음으로 이미 속죄제물이 완성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초조해 하는 것입니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이미 확정되어서 이 세상에 계시로 주어진 이상, 신자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앞에서 장래 문제로 인해 초조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장래가 속죄제물 되신 주님 안에 확정되고 보장되어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현재의 위치나 장래의 문제 때문에 초조해할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자가 초조해 하며 산다면 그것은 믿는 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모독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말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산다고 하지만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땅에 있는 우리가 항상 하늘의 뜻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시고 일하시는지를 생각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불려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장래를 생각하면서 초조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대학을 못가면 어쩌나' '나중에 자기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면 어쩌나'라는 초조감으로 마음이 불안하지만, 자식 역시 내 뜻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나에게 보내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초조해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초조감이 사라지지 않고, 초조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 역시 이 초조감에서 나오는 애타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래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확실한 것을 지금 나에게 달라는 것이 기도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는 이유는 거의 대다수가 현재 위치와 장래 문제에 대한 초조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뭔가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그 마음이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굳게 붙드는 힘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속죄제물의 완성이 미래의 확실성으로 그 속에 굳게 자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자에게 초조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자에게 초조감이란 왔다가도 금방 사라져 버릴 안개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초조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초조해도 억지로 참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체를 행복으로 여겨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리스도를 행복으로 여기려고 해도 안되는데 어떻합니까?'라는 반문을 하고 싶습니까? 그리스도를 행복으로 여기고 싶어도 안되는 것은 끝까지 자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행복이 되면 나는 근심도 없고 초조감도 없고 불안도 없는 평안한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겠지'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볼 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역시 난 안돼'라고 자기에게 실망하고 결국 장래의 문제까지 흔들려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붕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람은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서 초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붕괴'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자리할 때 '자기 붕괴'라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고 말하는 말씀을 보면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축복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안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말을 보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상상하고 있는 축복의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에 빠져있는 인간은 필연코 자기에게 도움을 주고 자기를 유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축복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성경은 분명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시편이나 여러 성경에는 하나님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을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는 것이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뜻을 위해서 존재하고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돕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축복이라고 외치는 것도 역시 가짜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들고 오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에 무엇이 있습니까? 돈입니까? 승진입니까? 큰집입니까? 멋진 예배당입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고 오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아는 자가 진짜 복 있는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불같은 율법의 복을 아는 자는 주의 발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여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시렵니까'하면서 QT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붕괴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졌다고 할 때, 그 수류탄을 받은 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류탄이 터짐으로서 자기 자신은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수류탄을 받은 자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류탄이 던져질 때 피하고 도망치려고 하지 누구도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새해가 되면 목사가 성경구절을 적은 쪽지를 뽑아 주면서 그것이 한해 동안 그 가정에 주는 말씀이라고 말한답니다. 그리고 말씀이 적힌 쪽지를 받은 가정에 우리 가정에 이런 귀한 말씀을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마다 주기 위해서 쪽지를 성경구절을 적는다면 과연 어떤 구절을 적어 놓겠습니까? 몽땅 듣기에 좋은 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을 받으면서 은혜가 된다고 하고 감사하다고 헌금을 하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장래에 대한 보장도 아니고 희망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장래의 초조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붕괴입니다. 마치 수류탄이 우리 가슴에 집어넣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붕괴, 이것이 말씀을 받게 된 자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주어질 때 왜 자기 붕괴를 가져오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불같은 율법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율법이 아니라 불같은 율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불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태워버리는 것이고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축복으로 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은 율법, 즉 말씀에 의해서 내가 태워지고 사라지고 심판을 받는 것, 자기 붕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고 오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모든 죄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숨겨 있던 죄까지 다 드러남으로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던 도덕과 윤리까지 벗겨짐으로서 부끄러운 자신의 실체가 여지없이 발각되는 현장이 말씀의 자리입니다. 그로 인해서 '나는 괜찮은 인간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희망 기대감들이 모두 다 무너질 때 사람은 자기 붕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붕괴 속에서 비로소 내 앞에서 나를 가로막고 심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말씀이란 내가 듣고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말씀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을 들은 자이지 말씀을 받은 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의 현장은 주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수류탄과 같습니다. 내 속에서 말씀이 터질 때 나라는 존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 아끼며 사랑했던 것들, 열심히 쌓아왔던 것들, 고이고이 간직해 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붕괴되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현상이 내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하고, 그래서 말씀의 사람이 되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말씀에 이끌려가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왜 보십니까? 왜 말씀을 듣습니까? 설교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듣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헛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말씀을 봅니까? 그것도 역시 헛일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대할 때 내가 붕괴되어지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철저히 나를 붕괴시켜 주십시오'라는 간절함으로 말씀 앞에 나오는 것,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가 되었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자리로 이끌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은 주의 발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 자게 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말씀을 받는 자 되게 하는 것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일을 가지고 쉽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잘되는 것이 사랑이고 축복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할말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말씀을 너무 소홀히 여깁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에게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간은 그 말씀에 의해서 내가 어떤 자인가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을 받느냐 밀쳐 내느냐에 따라서 내가 무엇을 따라 사는가가 발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에게 자기 붕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위기를 가져오고 우리를 위태롭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 때문에 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 싫어서 말씀을 밀쳐낼 때 그로 인해서 내가 바로 주님을 찌른 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들 하나하나가 인간을 위태롭게 하고 소중히 생각하고 아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같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때는 말씀에 의해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 말씀이 있는 현장에서 말씀을 선택하고 말씀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장차 천국갈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갈 자 지옥갈 자라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는 지금 이미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붕괴가 없는 말씀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깨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말씀이 없는 삶은 결국 허무로 끝나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말씀이 소중한가를 생각하십시오. 말씀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세상 것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말씀이 없이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모르면 자기 의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가 드러난 현장에서 가려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재의 자기 위치나 장래에 대해서 초조감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기 붕괴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현재나 장래에 대해서 확실성을 심어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초조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세상에 대해서 초조하기 때문에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말씀이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참된 축복에 대해서 눈이 가려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죽입니다. 우리를 붕괴시킵니다. 무엇하나 의지할 것 없고 붙들 것 없는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리고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의 완전성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헛된 것이 무엇이고 확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산다는 것이 자기의 것이 무너지고 주님의 것을 의지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가능하게 되어졌음을 알고 그동안 세상에 의해서 가려졌던 주님을 말씀으로 인해서 확실하게 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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