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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2 (신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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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의 인생을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반대로 인생을 소유하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 이유는 나의 인생은 내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인데 왜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고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지키려고 하고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인간이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세상에 태어납니까? 인간은 부모의 뱃속에 잉태되면서부터 태어나고 죽기까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인생의 선택권이 인간에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권력 있고 돈있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에도 태어나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태어난다는 그 자체가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주관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지고 인도함 받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분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던져진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인생이 주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쓸데없는 것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주신 분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지함입니다. 이런 무지한 인간이 지혜를 얻게 되었다면 그 지혜는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게 하겠습니까? 지혜는 내 인생을, 내 운명을 붙들고 있고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살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것을 몰랐던 것이 우리들입니다. 인생이란 우리들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우리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 되어진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는 그리스도안이라는 축복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생에 관심을 두는 자들은 많았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뭔지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항상 결론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해답이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게 하셨고 하나님이 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나게 하시고 살다가 죽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는 이 세상에서 은혜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해답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갈등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사용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쓰여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그런 대로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쓰여지고 있느냐입니다. 가령 돈 많은 부자 되게 하시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셔서 나를 쓰신다면야 얼마든지 환영을 하겠는데 그렇지 않고 고생하고 힘들게 사는 인생이 되게 해서 쓰신다면 누구나 기겁을 하고 도망쳐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사용하시든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린 오직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게 되는 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인생을 포기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자기 인생을 포기했다고 하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포기했다는 것은, 내 힘으로 내 인생을 가꾸고 개척해 보려는 욕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있으면 있는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는데만 관심을 두고, 돈이 없으면 없는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는데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 소유 당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들고 오시는 축복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말씀 앞에 엎드려서 말씀을 받는 자 되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알았습니다. 말씀 앞에 엎드리고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선택해서 내가 내 의지에 의해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선택하고 말씀에 나에게 오셔서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사람이란, 말씀을 지키고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소유된 사람입니다. 말씀이 신자를 소유해서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인도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복은 내가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당한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소유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복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지 하나님더러 자기에게 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머리되신 분을 따라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간다'는 말에는 자기 인생에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하고자 살아 길 때 인생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하고 받아들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축복을 자기 인생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으로 오해해 버렸습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왜곡시켜 버린 것이 현 교회입니다. 이러한 왜곡 속에서 나오는 인간의 모든 종교 행위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껍데기를 둘러 쓸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잘보여서 복받겠다는 욕심이고, 십일조는 하나님께 나의 정성을 확인시켜서 복을 누리겠다는 욕심입니다. 기도 역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하는 욕심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우린 꼭 욕심이 없이 사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우리 역시 욕심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입에서는 복음이 나오고 우리 마음도 주님을 믿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데, 사실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욕심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포기되어지지 않은 집착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들을 어떻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복음이 무엇인가는 알고 있지만 복음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주님만 따라가는 삶도 살지 못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역시 말씀에 대해서 실패한 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들을 어떻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고 완성하셨는데 우리가 나서서 보태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동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다거나 부족했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무엇인가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스스로에게 낙심하고 실망한다는 것은, 여전히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언제나 실패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자가 성공자로 바뀌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신앙이 아닙니다. 실패자가 자기의 실패를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자기의 실패를 알았을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나는 분명 실패자인데, 내 속에는 예수님을 믿을 만한 조건도 자질도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해서 아직까지 주를 주로 믿는다고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뜬 자가 바로 성공자이고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인간이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하시고 실패한 인간에 대해서 책임을 묻고 버려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에게 다가오셔서 말씀이 그를 소유하심으로서 주를 믿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인간으로 하여금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선택하시고 소유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명기 33장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내용입니다만, 축복을 인간이 잘해서 세상의 좋은 것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개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신명기를 살펴봤지만 이스라엘이 잘했다고 말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통 실패하는 모습들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주제는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죄인 주제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죄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죽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대가가 아닙니까?

본문을 다시 보면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르우벤을 향한 축복입니다. 이 말은 르우벤 지파가 살아서 번창하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고 르우벤 지파가 좋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르우벤이 받은 축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르우벤이 과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창 49:3,4를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야곱이 죽을 때에 자기 열 두 아들에게 각각 후일에 당할 일을 미리 말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르우벤에게 결코 좋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의 미래는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창 35:22절에 보면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한 내용이 나오는데,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르우벤은 장래가 탁월치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르우벤은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서모와 통간한 것이 잘못입니까? 서모와 통간했다는 것 자체를 두고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윤리이고 도덕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서모와 통간하지 않은 사람은 의로운 자가 되버립니다. 야곱은 르우벤을 향해서 서모와 통간한 것 때문에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서모와 통간했다는 행동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것으로 말함으로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서모와 통간한 자는 저주 받는다가 아니라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나쁜 행동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된 행동을 하게 하는 뭔가가 우리 속에 본질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이 서모와 통간하는 것도 서모와 통간했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러니까 너는 저주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서모와 통간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이미 르우벤 안에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바로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8:8절을 보면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계모의 하체를 아비의 하체와 일치시킴으로서 계모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결국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경우를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쓰러져 있을 때 함이 아비의 하체 드러낸 것을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함과 셈 야벳의 행동은 둘로 구분이 됩니다. 아비의 하체, 즉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가리는 행동과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함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셈을 축복하는데 셈 자체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셈의 하나님을 찬송함으로서 그러한 행동을 드러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노아의 식구가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데,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은 축복이고 가리는 것은 저주받을 모습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방해하는 함의 행동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르우벤이 서모와 통간한 것은 곧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렸다는 은혜성을 모독하고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주받을 모습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르우벤의 악함은 서모를 통간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했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악함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으시고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을 통해서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들은 이웃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에 열심입니다. 이웃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수치 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재미있어 하고 즐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웃의 부끄러움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르우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르우벤이 곧 저와 여러분이고, 따라서 우리가 저주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르우벤이 죽지 않고 살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야곱은 르우벤의 장래에 대해서 탁월치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했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하신 축복의 말씀에는 죽지 않고 살고 번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한 저주는 무용지물이고 허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르우벤을 저주한 것이나 하나님이 모세를 축복한 것은 모두가 르우벤이라는 한 개인을 향한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래를 르우벤을 통해서 미리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르우벤 같은 그런 정신은 저주받을 정신임을 말함으로서 르우벤과 같은 속성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저주 안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주 안에 있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의 저주와 하나님의 축복이 전혀 상반된 것이 아니라 축복이 무엇인가를 더욱 밝히 말해주는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상세하기 말씀드리느라고 얘기가 복잡하게 나열된 것 같은데, 간단하게 말해서 르우벤을 향한 하나님의 복은 저주를 극복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저주 안에 있는 자가 저주를 극복한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일뿐입니다. 인간은 단지 저주 안에 있던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고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며 이 일에 여러분을 사용하시고자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내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지금까지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가 열심히 일하고 직장 다녀서 그 수입으로 자식 키우고 먹여 살리고 집도 장만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러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분이고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어떤 기적적인 사건이나 느낌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를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 과연 여러분의 자질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었고 여러분 스스로 주님을 선택해서 믿어온 것입니까? 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의 출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믿음이 나를 붙들어서 주님을 믿게 했다면 결국 나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내 스스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자료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부끄러움을 범한 이웃이 있을 때 그 부끄러움이 곧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웃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 수치를 회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신자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여러분에게 인생에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곳이지 자기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를 자랑할 때 그 순간 나의 자랑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웃이 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의 하나됨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 안에 있고 은혜를 믿느냐 입니다. 저주 안에 있는 우리가 생명 안에 있게 되었다는 이 은혜에 대해서 아무런 감사함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질인 저주, 즉 사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모든 것을 통해서 저주 안에 있는 자신의 실태를 발견하시고, 저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놀라운 피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할 때, 마음껏 그 은혜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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