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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3 (신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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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상관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가령 누군가가 복권에 당첨되어서 7억이라는 돈을 거머쥐었다고 할 때,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이웃의 아무개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을 했으면 그 좋은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이 모두 자기와 상관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가지만, 살아 갈수록 세상일이 자기 바라는 대로 되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은 세상의 좋은 것과 연관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유독 자기 자신에게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 불공평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인생은 어둠이고 고독이고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세상과 교통하면서 세상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이 하나하나 자기의 수중에 자리하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집약해서 '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단절하게 하시고 새로운 세상이신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드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곧 성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하고 소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과의 탄탄한 연결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이 내 차지가 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심거리는 '하나님이 있다 없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그것은 관심 없고 다만 있다고 믿어 줄테니까 제발 세상의 좋은 것들을 나에게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주일 만들고 부활주일 만들어서 예수님의 고난을 슬퍼하고 부활을 기뻐할 테니까 그런 우리들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가 바라는 소원들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행동들이 내가 잘되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단절을 두려워합니다. 세상과 단절되면 마치 자기 인생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단절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생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인생 포기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두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민중들의 귀에 달갑게 들려질 리가 만무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복음이라는 이름 아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지만 과연 말씀 하나 하나가 여러분에게 달가운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내 인생의 전부라는 느낌이 여러분에게 살아있습니까? 말씀 속에서 영원을 내다보며 영원이 있기에 잠시 잠간의 세상에서의 인생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들이 여러분에게 존재하고 있습니까? 만약 인생을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이 계신다면 저는 그분에게 인생의 이치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요 15:19절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택함을 입은 자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러한 말씀들이 세상에 자기 자리를 구축하려는 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항상 세상과 친화하고 교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인간세계에 오신 예수님이 택함 받은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인간들의 마음에 옳은 진리로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남아있고 살아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된다면, 예수님의 비유처럼 그 마음은 옥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서 누구의 마음이 옥토이겠습니까? 옥토 같은 마음 밭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옥토 같은 마음 밭으로 가꾸자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것도 역시 엉터리입니다. 옥토란, 돌밭 가시밭을 개간해서 만들어진 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개간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조금 개간한다고 해서 세상의 미움을 당연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옥토란 주님이 만드신 밭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돌밭 가시밭이 옥토로 뒤바뀐 것입니다. 옥토이신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심으로서 옥토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미움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뭐가 참된 성도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이며, 세상과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임을 말씀드림으로서, 현재 세상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과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택한 자의 모습이 보여지는 신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내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고 해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역시 무의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온다고 해도 나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고 기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서 말한 대로 모든 것을 자기와 연관시키기 위해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세상에서 당당히 신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복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으로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의 실체를 하나하나 파헤쳐보면 점차 우리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듯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딛고 있었던 디딤돌이 사라져 버리고 전혀 디딤돌 같지 않은 것이 내 발 밑에 놓여 있음을 알고 그 디딤돌을 못미더워 하고 불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딛고 올라선 디딤돌은 결국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고, 주님께서 놔주신 그 디딤돌만이 굳건한 반석임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부터 인생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서 밝은 빛을 달려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다고 해도 두렵지가 않고 좋은 것들이 내 수중에 없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는 당당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쓸쓸한 것 같고 볼품없이 보일지 몰라도 주님이 보실 때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이러한 인생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서 볼품없이 보여진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마시고 다만 주님의 증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의 증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신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7절을 보면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축복에 대해서 2주 동안 말씀을 드렸지만, 어느 것 하나도 우리의 상식으로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축복이라고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앞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7절의 말씀을 아무리 뜯어 봐도 복이라고 인정할 만한 구석은 전혀 없습니다. 혹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라는 문구를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하나님이 유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복으로 생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다 응답해 주신다면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유다의 기도를 들어서 소원성취하게 해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유다에게만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소원성취를 위한 하나님으로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7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7절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서 우린 하나님의 참된 복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복있는 자'가 어떤 자인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자신을 복있는 자로 바라보게 되어질 때, 없으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라는 말을 유다의 기도에 응답해달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 응답자체가 축복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기도를 했다 안했다 응답을 받았다 안받았다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과연 하나님이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는 그 조건이 뭐냐는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응답을 하시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응답하실만한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했으니까 응답하시겠지'가 아니라 내가 한 말이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되는 것들인가? 에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다에 대한 시각도 '유다가 한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 어떤 것이었느냐?'를 찾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유다가 한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면 유다가 등장하는 창세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창 49:8절을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야곱이 유다를 축복할 때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말을 하고, 또 10절에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다를 높이고 있는 것은 유다에게 높임을 받을 만한 뛰어난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한 말은 열 두 아들이 보여줬던 행실과 삶의 태도를 근거해서 장래 되어질 일을 미리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 두 아들을 내세워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되는 삶과 복이 되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유다를 높이고 축복하는 것은, 유다 자체를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와 같은 삶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고 축복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는 유다의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는 사건 속에서 드러납니다. 요셉은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에게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시므온을 붙잡아 둡니다. 그리고 말째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떤 일이 있어도 베냐민을 데려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시 형제들이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의 자루에만 은잔을 넣고, 그것을 구실 삼아서 베냐민을 도둑으로 몹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다시 인질로 삼게 됩니다. 여기서 유다의 반응은 창 44:33절에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라는 말씀대로 '나를 대신 종으로 삼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고 대신 베냐민을 돌려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 것은 유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창 44:20-32). 결국 33절의 유다의 말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을 해함으로서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삶의 태도가 이제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로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에 '내가 종이 될테니까 베냐민은 돌려 보내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입니다. 유다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서 요셉을 만나게 되었고 모든 형제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유다의 정신, 즉 희생의 정신을 중심으로 해서 인도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피의 정신을 따라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피의 정신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피의 정신과 어긋나게 살아가는 세상과 싸우고 이겨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에 참여되는 자가 곧 복있는 자입니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라고 말씀하는데, 유다가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입니까? 희생의 정신을 모독하는 세상의 삶의 방식과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유다의 축복이란 하나님의 이 싸움에 참여된 자로서 살아가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축복이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과 전혀 다른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축복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도저히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씀할 때 '과연 그렇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복안에 있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힘은 '희생'입니다. 희생이란 내가 죽는 것인데, 이것을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힘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을 말합니다. 지배하고 군림하고 다스리면서 살아남는 것이 곧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곧 이긴 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힘은 '희생'이며, 이긴자라는 것은 희생된 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 49:8절에 보면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다에게 힘을 줘서 그 힘으로서 원수를 이기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세상적인 시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힘을 쓴 자는 힘으로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힘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의 세계는 세상입니다. 힘을 모으고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힘없는 자로 오셔서 힘에 의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야 할 죄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희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힘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힘을 복으로 여기며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주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힘을 추구할 때, 그 힘에 의해서 약자가 해를 입습니다. 그것은 결국 힘에 의해서 예수님이 희생당하셨던 십자가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힘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의 싸움이란 힘을 얻어서 그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하고 희생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곧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이 싸움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유다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희생으로 세상을 이기는 희한한 싸움에 참여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나의 원수로 간주해서 싸우는 싸움에 쓰임 받는 것, 이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 주세요' 이런 사람은 아직까지 축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달라고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하려니 돈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돈을 채워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돈 달라는 것이 교묘하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 되버리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려는데 돈이 없습니다' '구제를 하려는데 돈이 없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가 돈을 좋아하는 인간의 핑계거리일 뿐입니다.

희생과 섬김에 돈이 필요합니까? 건강해야만 합니까?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높은 지위가 필요합니까? 그런 것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희생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그 희생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다스리며 순간순간 그리스도의 희생이 보여지는 쪽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예수님의 희생이 귀하다고 하고 그 희생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말은 잘하면서 정작 예수님이 나를 붙들고 희생의 자리로 끌고 들어갈 때 그 손을 쳐버리는 삶이 아니었습니까? 남의 희생에는 감동하고 기뻐하고 귀하게 생각하면서 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싫어했던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의 태도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에서 다스리고 있는 신자에게서는 분명 희생의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나의 희생을 싫어하고 거절했던 우리의 죄가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멀리했으며 구원은 좋아했지만 희생의 피는 싫어했는가가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원수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사랑 앞에 무릎을 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해서 희생이 보여지는 삶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인생을 그리스도의 희생을 증거하는 싸움에 사용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희생의 피의 흔적이 담겨 있는 그 마음이 높임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복을 거절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복이냐?'고 소리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희생을 생명으로 여기고 아들을 희생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나를 희생의 싸움에 사용해 주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희생했느냐를 묻지 마시고, 내가 주님의 희생에 참여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희생의 싸움에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이 바로 마지막 때 승리자이고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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