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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4 (신 3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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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 문답 1문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일 되는 목적이란 제이 제 삼의 목적이 추가로 주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제일 되는 목적만이 참된 목적일 뿐 나머지는 인간이 가져서는 안되는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세상에 난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제일 되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나게 하신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기의 인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태어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이 없는 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오늘은 어떻게 쓰시겠습니까?'를 물으면서 하나님께 쓰여지는 것을 내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런 말이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에게는 당연한 말로 들려지지만, '자기 인생'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은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래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꼭 생각하지 못하고 놓쳐 버리는 것은, '하나님께 영화로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실 문제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지 결코 인간 편에서 결정하거나 내세울 부분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도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난 후에 말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의 것을 누리고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고 오로지 인간을 하나님 멋대로 사용해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는 분이시라고 했을 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신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 마음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기준을 만들 수 없습니다. 가령 나는 돼지고기는 싫어하고 쇠고기만 좋아하는데, 쇠고기는 싫어하고 돼지고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너도 돼지고기 좋아하지'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따로 존재하듯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무엇이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물으면서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에든지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자기 편한 대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관심을 끊어버립니다. 일단 나에게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이어야 받아들이려는 자세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예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 할 목적조차 없습니다. 단지 나에게 영광이 되었을 때, 나에게 기쁨이 되었을 때, 나의 영광과 나의 기쁨에 하나님을 끌어드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내가 뛰어들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에 뛰어들겠다는 각오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기보다는 즐거움의 조건을 온통 세상 속에서 파헤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고 모여야 할 것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라는 단체 아래 모여든 인간의 기쁨을 위해서 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제공해야 사람들을 붙들어 놓을 수 있고, 또 외부에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교회다운 교회의 기준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도덕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 편에서 자기 마음에 만족이 될 때 '아 이 교회가 더 낫구나'라는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목사로는 교회라는 단체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람들의 즐거움이 되도록 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피곤한 마음과 몸을 쉬기 위한 휴게소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말에 대해서 '심하다' '너무 비판적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다거나 비판적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인간의 것을 최소한이나마 붙들고 있으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인간은 이런 존재다. 왕창 다 망해 버려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손에서 놔버리기가 아까운 것이 아닙니까?

신자가 인간의 것을 모두 놔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세상을 본다면,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더러움과 죄악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심과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본심과 뜻을 알아서 거기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욕구 성취를 위해서 모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 살아있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도 살아있는 것을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자기 즐거움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의 즐거움에 침범하거나 자기 즐거움을 소멸시키는 자는 누구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오늘날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라 문서화된 성경 자체로 끝났기 때문에 '성경이야 해석하기 나름이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인간의 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사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쓴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서 계시를 글로 쓴다고 했을 때 성경과 다른 말을 쓰겠습니까? 역시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쓰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것을 새로운 계시로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글이 쓰여진다고 해도 그 내용이 역시 인간의 것을 철저히 부정하는 내용이라면 어떤 핑계와 구실을 대서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뻔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가 하늘에 나타난 글씨라고 해서 믿을 리가 만무합니다. 단지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난 신비로운 현상에만 관심을 집중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로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자세로 살아가는가?' '내 인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도구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함으로서 다시 한번 우리의 현재를 확인하고 오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본문은 유다에 이어서 레위를 향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축복함에 있어서 그냥 '앞으로 잘 살아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모습을 드러내어서 축복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까 우리도 축복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복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복을 받으려는 탐욕으로 말씀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복인가를 깨닫고 현재 내가 어떤 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신자로서 바른 자세입니다. 내가 이미 복안에 있고 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또 다른 복이 필요하겠습니까? 복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복 아닌 것에 매어서 마음졸이고 근심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현재 자신의 복에 대해서 다시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복된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인생에 대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인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 편에서 자기 인생을 바라보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내 인생을 인도하고 책임지려고 한다고 해서 내가 의도한대로 인생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사람이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한대로 따라가는 사람이나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순간순간이 결정되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애쓴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인생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여러분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 꼭 해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인생을 위해서 아무런 힘도 쓰지 말라면 그냥 가만히 놀고먹고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직장을 다닌다면 그 직장은 내가 힘써서 들어간 직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 직장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목적 역시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직장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셔서 나를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생각에서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마 6:31-32절을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너희 인생은 하나님이 손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고, 들의 백합화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살고 싶다고 해서 죽어야 할 자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신자가 빨리 천국 가고 싶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죽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용 기간이 끝났을 때 인생이 마감되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인생을 마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인생을 우리 욕심대로 이뤄보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는 그릇으로 존재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누가 부자로 살든 권력을 누리든 그것으로 자기 인생을 비교하고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자로 사는 것은 우리의 바램이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부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사람은 부자로 살아서 좋겠다'는 마음은 하나님은 생각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위는 어떠했습니까? 8,9절을 보면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말하면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들을 죽이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곧 복된 자의 자리에 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찬을 하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칭찬을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칭찬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마음에 일치가 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복안에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축복의 비밀을 누가 알겠습니다. 자기 인생의 성공에 모든 목표와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엔들 관심이 있겠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레위 지파의 칭찬을 복으로 인정하기에는 난처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 때문에 부모 형제 자식을 죽인 것을 칭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본문의 이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산밑에서 모세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모세가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이것은 믿고 있던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자기들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과 방법을 끄집어 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반항을 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지 금송아지가 아니었습니다. 출 32:26절에 보면 모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이 말씀은 여호와 편에 서서 여호와의 인도를 받을 자와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계속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갈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때 금송아지를 만들 때 개입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모세의 말에 따라서 레위 지파가 여호와 편에 서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인도함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금송아지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그냥 만든 것이 아닙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패물을 바쳤습니다. 즉 금송아지에는 자기가 아꼈던 금붙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편에 서겠다는 것은, 내가 아꼈던 모든 것도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아꼈던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 편에 서서 사는 자의 모습이고, 이 편에 레위 지파가 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금송아지 편에 선 자들을 모두 죽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자기 동생도 있고 형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출 32:29).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여호와께 헌신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레위 자손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 편에 서서 형제와 자식까지 죽인 레위 지파가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으면 그들이 받은 복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레위 자손이 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까? 레위 자손에게는 소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을 누린 모습이 없습니다. 분명히 레위 자손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주어진 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복은 재산을 풍족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대적하는 자들의 허리를 꺾어 버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역시 재산을 풍족하게 해달라는 복을 말하지만, 레위 자손이 재산에 풍족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레위 자손은 재산과는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주어진 분깃이 없고 소유 재산이 없는 자가 레위 자손들인데 그들에게 재산의 풍족을 말한들 무슨 해당사항이 있겠습니까? 결국 주어진 분깃이 없는 자들에게 재산의 풍족을 말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고 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재산을 단지 세상의 돈으로, 부요해 지는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혼란입니다. 재산이란 세상에서 힘입니다. 결국 재산이 풍족하게 한다는 것은 힘있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는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레위 자손을 축복하셨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만약 레위 자손을 축복하셨다면 말씀 편에 서서 형제 자식을 죽인 사람들만 아니라 대대로 레위 자손이라면 조상의 행위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복은 혈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이어집니다. 즉 말씀 편에 서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모 형제까지 죽이는 그 정신을 따라서만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레위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내 집안이 잘되고 내 사업이 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편에 서서 말씀이 인도하고 말씀이 주관하고 말씀이 활동하고 말씀이 대우받는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인간된 것, 이것을 가지고 복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할 때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 편에 선 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서있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죽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말씀 편에 서 있는가 말씀 밖에 서 있는가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부터 말씀 편에 서지 않으면 그는 레위 자손이 아니고 복과도 거리가 먼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8절에 보면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둠밈과 우림은 이스라엘을 판단하는 기구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주의 경건한 자라는 뜻이고, 경건한 자는 말씀 편에 서서 부모와 형제까지 죽일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말씀 편에 서서 말씀을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도 포기할 수 있는 정신으로 사느냐?'를 묻습니다. 참으로 부담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부모 형제가 말씀을 벗어나면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 편에 서서 말씀이 아닌 것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된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인간 관계나 혈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말씀의 원수된 것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 있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힘을 주시고 대적의 허리를 여호와께서 꺾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이 시간 말씀 편에 서 있는가? 말씀의 도구로서 사는가?'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도구로 살아갈 때 내 인생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질이나 나의 직장이나 가정은 말씀의 도구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떡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를 어려운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내 어려운 것만 내세우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편에 서지 아니한 자는 죽여 버리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싫어하는 자들입니까? 사사건건 내 인생을 들이대면서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인간이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말씀을 앞세우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복에 참여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사람된 것이 복입니다.

돈 버는 일에 마음 뺏기지 말고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모든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나같은 것도 말씀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인간 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달리 불속에도 밀어 넣으시고, 가시밭길도 가게 하셔서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우리를 이런 인생으로 인도하실 때 실망하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세상 것 달아난다고 아까워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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