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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의 죽음 (신 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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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활동은 자기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에 존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려웠던 시절에는 자기 존재 유지라는 것이 단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경제력이 증가되면서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게 되자 자기 존재 유지는 먹을 것 입을 것이라는 범위를 뛰어 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이미 해결된 상태에서 이제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간에 대한 평가 기준은 그 사람이 세상에 도움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누구라도 사회가 발전하고 나아지는데 도움이 되고 필요한 인간이라면 그는 세상으로부터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사랑 받게 됩니다. 즉 인간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가치 있는 직원은 회사의 발전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직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직원이 사랑 받고 대우받는 것이 사회의 법칙입니다. 가정에서도 역시 돈을 많이 벌어서 가정을 유지할 수 있고 자녀들의 원하는 것을 마음껏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장이 대우를 받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가족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고 가정 유지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못하는 가장은 가치 없는 가장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잃어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끊어진 가장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가 하락된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돈을 벌지 못함으로서 세상에서나 가정에서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 고통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존경받고 칭찬 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는 것을 증거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는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비록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유지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분, 우리 교회의 기둥, 우리 교회에 없으면 안되는 분'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 자는, 모든 활동이 자신의 존재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될만한 일만 하게 됩니다. 말한 대로 애당초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존재 가치가 향상될 수 있는 일인가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하게 보이는 일은 나보다 존재 가치가 덜한 사람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존재 가치가 높은 나는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 5:44절에 보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단언하고 있는 것은, 하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세상의 자기 영광을 구하고 사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한 자는 그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인간이 보기에 믿음이 있는 것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도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한 모습을 내비칠 때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이 나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줄 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고 그 일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자기 활동을 통해서 자기 이름이 높아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활동을 해도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성도란 이미 자기 가치를 포기한 자입니다.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앞에서 자신의 더러움이 폭로가 되고, 그 더러움 앞에서 자신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관심을 두고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듣기도 하지만, 문제는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근본 취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대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영광이 될까'만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의 근본 취지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요 17: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의 죄를 폭로시킴으로서 인간은 도저히 영화롭게 될 수도 없고 영광을 얻을 수도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셔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게 하시고, 대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인간 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것으로 생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서 믿음이 있는 신자로 칭찬과 존경을 받고, 사회에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얻게 되면, 그것으로 마치 영원한 생명을 확보한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 받는 가치 있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생명도 보장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 21: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소위 가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세리와 창기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리와 창기가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에 바리새인들이 들어간다는 순서적인 얘기가 아니라, 가치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세리와 창기를 존경받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던 바리새인들보다 앞에 세움으로서 천국은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앞세워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의 영광이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쓸모 있고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는 인간으로 여긴다면 천국은 그런 자를 거부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를 마치면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한 인간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모세의 죽음이 나오지만, 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나이가 많아서 자연히 죽는 죽음으로 인식하면 안됩니다. 7절을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즉 모세가 나이가 들긴 했지만 신체적인 허약으로 인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눈도 흐려지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죽이신 죽음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모세가 죽은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모세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 성취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모세의 죽음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분통이 터질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고 광야 40년을 거치면서 지금껏 고생을 해온 사람입니다. 모세의 수고를 본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모세가 앞장서서 개선장군처럼 들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한 영웅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고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죽 쒀서 개준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다한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죽어야 하고, 약속의 땅은 모세 대신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세움 받아서 들어갑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일을 당한다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힘들 것입니다. 자신이 수고하고 힘쓴 대가는 모두 자신에게로 모으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영광의 순간 앞에서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세상과 단절돼야 한다고 할 때, 과연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고나 죽게 해주세요'라는 애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대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이 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보게 됩니다. 그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열망보다는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더 살고 싶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영광스런 존재가 되고 싶고 사랑 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본능이지만, 자신의 가치가 포기되어져야 할 순간에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모세를 세상의 영웅으로 만들거나 존경받는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이 일을 하실 뿐입니다. 그 계획에 의해서 모세를 죽이실 때 죽이시는 것뿐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약속의 땅에 앞에서 죽어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죽어야 말씀이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약속의 땅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앞에 두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자기 영광을 챙기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미움받을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서 2천년전의 사건과 같은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영광 자기 기쁨 때문에 주님이 무시당하고 죽으십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활동할수록 주님은 그런 인간에 의해서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주님을 높이는데 두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어려움에 처하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오직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럴 때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고, 자신의 괴로움도 실패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참으로 힘든 것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하면 안되고 죽으면 안된다. 성공해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쓸모 없고 가치 없는 자로 전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만을 꿈꾸며 살게 되고, 실패가 오게 되면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이요 은혜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심으로서 말씀을 성취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모세가 자기 영광을 고집 피우며 죽기를 싫어했다면 결국 누구의 일이 방해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방해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실패까지도,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실패하면 안돼'라는 생각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 모습이고,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 가치가 될만한 일만을 고르게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와 죽음을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실패가 없고 성공만 있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살아갑니다. 화목한 가정, 재벌은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부함, 자질이 있는 자식들, 예쁜 아내와 성공한 남편, 이런 것으로 둘러 쌓여 있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삽니다. 이것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환상이 실패와 죽음을 들고 오시는 하나님을 밀쳐 버리고, 오직 성공과 생존만을 들고 오시는 하나님을 환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성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삽니다. 실패는 저주로 여깁니다. 때문에 평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다가도 실패가 다가오면 사랑이 끊어져 버리고 맙니다. 실패에 의해서 끊어지는 것은 애당초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유혹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실패 때문에 끊어지는 사랑이라면 애당초 사랑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보다 못한 자의 자식은 내 자식보다 공부를 못해야 한다는 생각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밀쳐 내고 있는 것들입니다.

10절에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애굽에서 기적을 베풀고 홍해를 갈라지게 한 것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아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죽으면 안돼'라는 심정으로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왕 살아있는 것 성공한 자로 세상에 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이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쓰시고자 하시는지, 그 의도를 완전히 묵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마치면서 여러분이 다시금 염두에 두셔야 하는 것은 '인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고 영광 받는 존재가 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든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실패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실패해서는 안돼'라는 것은 결국 자신은 전혀 손해 보지 않고 고통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다가 천국 가기를 원하는 이기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욕망으로 모일 때, 교회에는 희생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희생이란 자기의 손해를 의미하는 것인데, '나는 실패하면 안돼'라는 자기 사랑으로 교회를 나온다면, 결국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희생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일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을 동안에 자기 영광과 자기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살아있음으로 감사하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십시오. 교회에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이 사라질 때 드러내십시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사십시오. 이러한 신자는 결코 자기 영광과 자기 기쁨과 자기 존재 자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위대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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