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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도피가 시작되다 (창 27:4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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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도 실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실수할 수 있고, 저도 목사지만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가를 치루고 고통은 겪을지라도 오히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고통스러운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형벌이나 고통의 대가는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작은 실수는 큰 실수를 막아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수를 하고 죄를 지으면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망자의 삶

에서의 실수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단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이 있어도 복의 가치를 모르면 복을 잃어버립니다. 바로 그 사람이 에서였습니다.
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장자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자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축복권도 잃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야곱은 실수와 죄에 대해 어떤 대가를 치룹니까? 야곱도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질렀지만 야곱은 에서와 달리 축복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도 장자권을 샀고, 거짓말 하고 사기를 쳐서라도 형의 축복권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야곱은 영적인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가져오는 방법이 거짓과 속임수였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전 생애에 걸쳐 정말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제일 먼저 치루는 대가는 형제사이가 원수 사이로 바뀐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에서는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 야곱이 한 없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으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다 얻은줄 알았지만 너무나 소중한 형제의 우애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태어났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나니

리브가는 부엌에 있으면서도 많은 정보를 듣는 사람입니다. 이삭이 하는 말을 듣고 에서에게 할 축복을 야곱에게 하도록 만들었고, 이번에는 에서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야곱을 피신시켜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의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것이 야곱이 치루는 대가입니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닙니다. 이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집어들고 보니 그것은 금덩어리가 아니라 자기의 손을 찌르는 가시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야곱의 삶은 도망자의 삶으로 변합니다. 언젠가 ‘도망자’라는 제목의 영화를 목사님들하고 함께 봤습니다. 그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도망자의 비극은 도망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망자는 결국 추적자의 손에 잡히고 마는 법입니다. 도피의 삶은 지치고 고독합니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면 갈수록 죄인의 삶은 비극적으로 되어갈 뿐입니다. 그 삶은 외롭고 피곤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처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늘날의 우리의 사회를 가리켜서 ‘도망가는 사회(Running away Society)’라고 표현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서 도망가고 자식과 부모또한 서로에게서 도망합니다. 또 학생은 선생으로부터 국민은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목표와 목적은 잘 잡았지만 그것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은 거짓말과 사기였습니다. 그녀는 잘못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그녀에게도 혹독한 대가를 치루는 시련이 따릅니다.
43, 44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리브가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 있는 오빠집에 잠깐 피신해 있으면 에서의 화가 풀릴 것이고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리브가의 착각이었습니다. 며칠이나 몇 달 동안만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후로 야곱과 리브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맙니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야곱이 그녀의 생애 동안 돌아오지를 못하고 영원한 이별이 되었으니까 리브가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상처가 부르는 비극

45절을 보십시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사람들 마음에 못을 박지 마십시오. 한을 심지 마십시오. 에서의 한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쉽게 풀릴줄 알았던 상처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하루에 두 사람을 다 잃어버리겠느냐’. 이 말은 리브가의 비애를 보여줍니다. ‘어찌 둘을 잃으랴’라는 말은 리브가는 이미 에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서와 리브가 사이는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서 하나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둘을 잃겠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리브가는 남편 이삭에게는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46, 47절을 보십시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생명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금방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삶이라고 번역하면 쉽습니다. ‘내 삶에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가장의 책임

지금 야곱이 떠나는 것은 결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서의 칼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말만 들어보면 멋있지만 속을 파헤쳐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리브가가 그랬습니다.
가정이 풍지박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과 동생은 원수지간이 되고 야곱은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이 가정은 믿음의 조상 이삭의 가정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에게도 이런 현실을 목격합니다.
리브가가 남편에게 떠나는 자식을 위해 축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리브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헷 사람 며느리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상한줄 아십니까’. 그래서 이삭은 야곱에게 ‘너는 헷 사람 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가나안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하나님 모르는 여자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라고 말합니다.
결혼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삭은 집을 떠나는 야곱에게 다른 말 보다는 ‘하나님 모르는 이방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은 축복의 산실이니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28장 1,2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네사람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실수를 한 사람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뒤바꾸려고 했습니다. 이삭은 가장이기 때문에 그의 실수가 가장 큽니다 .
가정의 결정적인 책임은 남자에게 있습니다. 남자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가족들은 방황하게 됩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리브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리브가가 거짓말 하지 않았으면 야곱이 실수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떠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인 이삭이 제 역할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가정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셨듯이 아버지는 보호자요, 안내자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아버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녀를 축복해 줄 만큼 그렇게 떳떳한 아버지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자기 자식에게 모델이 될만한 아버지, 성실하게 살고 책임감 있게 살며 자기 가정을 지킨 아버지가 몇 명이나 됩니까. 그래서 많은 자녀가 상처받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가장한 소중한 가치, 가정

저는 우리 교회 사역중에 특히 아버지 학교를 축복하고 격려하는데 이 사역에는 많은 열매가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참여자 중 10%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그 프로그램에서 늘 하는 이야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쁜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다’입니다. 돈 버는 것보다 자식 돌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사장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자기 자식을 돌보지도 못한다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교인 가운데 자식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바꾸고 서울을 떠나는 사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돈 벌고 성공하는 일들은 여러분의 당대로 끝이 납니다. 축복은 내 자녀와 또 그 자녀에게 대를 이어 계속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살고 혼자 누리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저주받은 것은 이혼율이 높고 동성연애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기 싫어하고 낙태를 쉽게 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 대로 끝내겠다’. ‘나 이상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역사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말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축복은 당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흘러 넘치고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가치의 하나가 가정입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순간적인 쾌락과 자신의 사생활을 맞바꿉니다. 낙태는 여자의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물줄기를 다 끊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엄청난 재앙을 준비하는 미래 사회로 가는 길목에 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삭은 사실 아들을 위한 훌륭한 모델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독특한 축복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축복할 만한 자격이 없을지라도 아버지라는 이름 때문에 자녀를 축복해야 합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축복

저는 모든 아버지들이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하는 아버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자기 자녀를 축복해 주었습니까?
첫번째, 먼저 권면을 합니다. ‘네가 이제 집을 나가 살게 되는데 내가 너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라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러분,
군대가는 자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유학가는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제 나의 손을 떠나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이 시집을 갑니다. 이제 남의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시집가는 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부모는 자녀에게 해 줄 말이 있어야 합니다. 이삭은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로 하나님 모르는 이방 여자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헷 족속이나 가나안 여자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결혼은 축복의 물줄기입니다. 결혼을 잘 못 하면 축복이 다 흩어집니다. 특별히 남자들은 두 번 결혼하지 마시기를 권면합니다. 축복이 흩어져 버립니다.
이삭은 자기 아들에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는데도 딱 한마디로 이방여자와 결혼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를 배필로 택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학력이 없고 얼굴이 못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의미입니다 .
저는 오늘 이 설교가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들과 그 부모들에게 영향력이 미치기 바랍니다.
권면에 말에 이어 두번째로는 축복을 해줍니다.
3, 4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이제 나이가 늙고 세상을 떠날 때에 여러분이 할 일은 자녀를 축복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돈 벌어서 누굴 주시겠습니까? 사회에 환원할 것입니까? 자녀에게 다 주시겠습니까?

가장 훌륭한 유산은 부모의 축복

성경을 보면 축복은 자식에게 가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 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라고 말합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이것이 축복권의 핵심입니다.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 중에 이루게 하시고 허다한 민족을 만들게 하시고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 처럼 네 자손이 번성케 될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서 나오는 축복 1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복을 받기 원합니다. 복과 믿음이 여러분 당대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자녀에게, 또 그 자녀의 자녀에게 계속해서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가정은 주님 오실 때까지 소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가정은 거룩합니다. 가정은 지켜져야 합니다. 사탄이 맹렬하게 하는 일이 가정 파괴입니다. 그래서 이혼율이 급증하고, 동성애자들과 아기를 낳지 않는 현상이 전 세계를 뒤 덮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과거에 결혼을 실패했다하더라도 다시 결혼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유태인들은 많은 수난 속에서도 가정교육과 가정의 소중함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은 파괴될 수가 없었습니다.
4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데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계약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너를 복주는 자를 복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다’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이삭에게 갔고, 이삭의 복은 야곱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계속 흘러 넘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렀습니다.
‘너의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여러분,
신약에 오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삭은 큰 복을 받았지만 자녀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났고, 에서는 잘못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리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잘못되는 자녀를 보는 아버지의 아픔이 이삭이 치루는 대가였습니다.

실수로 인해 무너진 가정

결국 에서는 아무 복을 받지 못하고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상처입은 마음을 야곱에게 돌려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떠나는 야곱을 아버지 이삭이 축복하는 광경을 보게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여자하고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말을 받아들이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에서는 자기 부인이 이방 여자여서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에서도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한 점을 알고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의 딸을 맞이하여 결혼을 합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을 생각해 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원칙을 버리지 마십시오. 실수를 해도 우리는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과거의 모든 상처를 딛고 우리는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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