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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을 만나주신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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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교활한 방법으로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았습니다. 단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은 그것을 사들인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명백하게 빼앗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복권은 에서를 속이고 사기를 쳐서 받아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막을 길이 없어서 도피를 하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고도 그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르고 고통을 겪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성격이 못되서 힘든 일을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야곱의 내면에도 못된 성품이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는 야곱

야곱에게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착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악한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경건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성향이 너무 강했습니다. 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도 알았고 장자권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에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너무 강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쉽게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는 인간안에 죄의 성품을 만듭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쌓고 쌓아지는 것입니다. 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유혹을 받으면 쉽게 무너지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잘못된 줄 알고, 그렇게 하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육의 욕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쉽게 죄를 짓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는 것으로 고난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결혼 생활과 사업 등 삶의 모든 과정에서 그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이것을 통해 야곱의 성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성품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육에 대한 성품’이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싶지만 죄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처절한 고백을 합니다.
착한 사람도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후회도 잘 하고 회개도 잘 합니다. 그러고도 또 쉽게 무너집니다. 육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났다’는 말은 야곱이 태어나서 자란 곳, 부모 형제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던 어머니 리브가를 떠나야 하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소한 땅, 생소한 사람들이 있는 하란을 향해 갑니다. 그 곳은 8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며칠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말이나 나귀 또는 낙타를 타고 집을 떠냐야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했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은 어디서 자나, 저녁은 어디서 먹나’ 등 순간순간 짧은 미래부터 먼 장래까지를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 에서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에게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수치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죄책감과 수치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합리화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입장이 되보면 이해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고민은 여전히 계속 됩니다.

야곱은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거나 적게 있다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하고 상관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병들거나 죽게되면 외로움을 느낍니다. 혼자 아파야 하고 홀로 죽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야곱에 대해 상상해 불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당장 오늘 저녁에 어디서 자야 하는가’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곳을 찾았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들녘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졌습니다. 거기서 유숙하려고 돌을 하나 취해서 베개를 삼아 누웠습니다. 야곱이 누웠을 때 그가 본 것은 하늘에서 빛나는 수많은 별이었을 것입니다. 배부르고 여유있을 때는 별을 보는 것이 찬란하고 멋있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춥고 외롭고 불안할 때는 오히려 허무함과 슬픔을 더해주는 것이 별입니다.
이제 야곱은 누워서 하늘에 별을 볼 뿐입니다. 그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지붕삼아 쭈그리고 누워서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될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과 의지했던 것을 다 내려놓고, 건강과 재력, 지위와 지식도 무너져내리고 직업도 그만두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을 때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곁에 남습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가진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막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절망했을 때 희망은 시작됩니다. 포기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절대절망과 좌절감 속에 빠져있을 때가 하나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야곱은 잠이 들자마자 꿈을 꿉니다. 그는 지나온 삶 속에서 여러차례 꿈을 꾸었겠지만 이번에 꾼 꿈은 독특했습니다.

꿈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그는 꿈에서 사닥다리를 봅니다.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이어진 사닥다리입니다. 좀더 자세히 보니 사닥다리에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그것은 새롭고 신비해서 야곱의 비애, 배고픔, 수치를 전부 잊어버리게 한 꿈이었습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은 참 높다. 하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생각을 했을 듯 합니다. 그러다가 사닥다리 하나가 있는 것을 보며 ‘아! 하나님께 가는 길이 하나 있구나’라고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닥다리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절망 가운데 하늘에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있고 하늘에 들어가는 문도 있다는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꿈속에서 본 이것들을 통해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13, 14절을 보십시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더 놀라운 사건이 생깁니다. 사닥다리 제일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야곱이 처음 만나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이 경건한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제사도 수 없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 자리가 처음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도 믿고 설교도 듣고 성만찬도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10년, 20년 동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넘어 서서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오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미 오셨습니다. 야곱이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봤을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몰라봅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부도가 나고 인간관계가 깨지고 이혼을 하고 자식이 흩어지는 것 같은 심각한 상황이 생겨야 그제서야 눈을 뜨고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야곱은 집을 떠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환경속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 친구가 되어주지 아니하고 홀로 섰을 때 그제서야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고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자신을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명상종교의 하나님이 아니고 불가지론자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이삭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자신의 모습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이제 ‘나는 네 하나님이 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라고 표현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변함없이 언제나 영원토록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네가 그동안에 너무나 오만하고 교만하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잘 되니까 너는 나를 잊어버린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잊은 적이 없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을 봤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났다면 기절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들었다면 삶이 변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상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조상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저기’ 계시는 분이 아니라 ‘여기’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번째, 더 놀라운 말씀이 15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아무 것도 제대로 한 일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복을 주시겠다는 선언을 듣습니다.

임마누엘, 영원한 언약

이 절에는 네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번째는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것이다’, 세번째는 ‘너를 이끌어 다시 이땅으로 돌아오게 해줄 것이다’, 네번째는 ‘이 약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처음 만났는데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를 축복하며, 너를 지켜주며, 너를 돌아오게 하며, 내가 너를 나의 자녀로 삼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담대하게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런 음성을 듣자마자 더 이상 꿈을 꿀 수가 없어서 꿈에서 깨어나기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벌떡 일어납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꾼 꿈은 백일몽이 아니고 개꿈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짜였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꿈과 현실은 하나입니다. 꿈에서 환상을 봤지만 그것은 현실로 이어지는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이런 환상과 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이나 이사야와 같이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이런 환상과 꿈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내가 하나님을 몰랐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녀서 집사도 했고, 장로도 했고, 목사도 했는데 하나님을 몰랐구나.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알았다’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것이 욥기 42장 5절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깊은 고난의 파도를 겪고나서 하나님의 실재를 본 것입니다. 욥은 ‘이제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영적 고백을 합니다. 삶의 변화는 이때 옵니다. 지식이나 깨달음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야곱이 제일 처음 한 말은 ‘두렵구나’입니다. 이것은 무섭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고 경외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바른 태도는 경외감입니다. 신앙인은 절대로 방자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도 굉장히 방자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만난 사람들은 마음에 거룩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니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아니었구나’라는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과 경외감,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경외감과 두려움으로 그를 찬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프로그램이 많고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있는데 하나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멋있고 매력은 있는데 감동과 은혜가 적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변하는 삶

18, 1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하나님을 만난 자는 새벽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과거의 삶과 달라진 것 없이 살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이 과거처럼 계속해서 똑같이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고 착각을 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분의 성령과 보혈, 그분의 능력과 심정 가운데 들어가는 일이 적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해 뜨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뜨자 마자 지난 밤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감동과 기쁨과 충격을 견딜 수가 없어 베개했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곧 예배 드리는 장소가 됩니다. 바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며 하늘의 문을 여는 곳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이 감격과 기쁨을 예배와 찬양으로 표현합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예배는 서약과 헌신으로 변합니다. 야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서원을 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있어서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으로 자신의 몸을 헌신하고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드린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셨고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나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야곱은 약속을 합니다. 야곱의 물질관이 변한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표현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월급이 적을 때는 십일조를 하지만 액수가 커지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서 십일조를 하지 못합니다.
야곱은 자기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뜻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때부터 야곱의 생애를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애를 간섭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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