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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십이지파 이야기1 (창 29: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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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12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로부터 축복의 그릇인 십이지파가 만들어 집니다. 하나님은 십이지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셨고 예수님의 12 제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상처투성이의 인생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부모나 형제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자랑스럽고 떳떳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여러번 결혼했거나 배다른 형제가 있어서 겉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굉장히 부담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을 주셨는데 야곱의 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가정사가 복잡해집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어머니가 4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가정은 화약고와 같이 항상 긴장감이 맴돌고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잡한 가정의 12명의 자녀를 통하여 열두지파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불행한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기서 굴복하지 않고 7년을 더 일하기로 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의 결혼생활 중에 아마도 자매인 레아와 라헬, 두 여자의 갈등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또 야곱은 장인 라반이 자신을 속였기 때문에 장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갈등속에 있는 복잡한 가정 내용을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혼동스러운 가정을 축복의 가정으로 택해주셨을까요? 여기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섭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를 불러 자격 있게 하시고, 믿음 없는 자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시고,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불러서 희망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구원과 축복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는 은혜가 이 메시지속에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 부끄럽고 어려운 사정이 있다 할지라도 야곱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축복과 위로를 같이 누릴 수가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레아는 결혼했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레아같이 식모나 씨받이 처럼 살았던 불행한 여자가 많았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레아는 불행하고 한이 서려있는 여인들의 표상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라반에 의한 사기 결혼에 동조해서 불행한 결혼을 하고 맙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적극적으로 노력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남자를 얻기 위해서 결혼 전에 동거를 허락해서라도 그 남자를 붙잡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레아가 바로 그랬습니다. 레아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야곱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절망과 좌절감만 싹트기 시작하고 상처와 한이 쌓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남편에게 상처받고 절망하고 좌절했기 때문에 레아는 하나님께 하소연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레아의 모습은 시편 27편 10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자기가 낳은 자식도 부모가 버릴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남편은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레아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의 마음을 돌이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던 고백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은 놀랍게도 레아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태는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라헬은 남편을 의지했고 레아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눈물을 뿌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십시오. 금식하며 하나님께 고통의 소리를 질러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레아가 잉태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제일 큰 아들입니다. 르우벤이란 뜻은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 하나님이 나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을 얻고난 레아에게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리라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편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레아는 실망과 좌절을 겪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두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남편이 이 여자를 멀리 하고 있으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아셨다는 뜻입니다. 레아는 시므온을 낳았을 때 이제는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야곱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세번째 아들, 제사장 족속의 조상인 레위가 태어납니다. 레위의 이름은 이 아들만 태어나면 ‘남편과 나는 연합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도 이 여자의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남편의 사랑을 회복시키는데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무척이나 안쓰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얼마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또다시 그녀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네번째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유다입니다. 그런데 이 네번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레아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자 아이 셋을 연년생으로 낳아도 3년이고 조금 터울을 두고 낳으면 5년 내지 6년이 걸렸을 것입니다. 네번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그렇게 기다렸지만 남편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은 지칠대로 지치고 상처받을대로 받고, 희망은 꺾어질대로 꺾어졌습니다. 레아는‘남자를 의지한다는 것이 별볼일 없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레아는 남편을 의지하고 사는 결과는 배신밖에 없고 허무함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여자들은 남편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눈물이 찬송으로

네번째 아이를 낳을 무렵 드디어 레아는 남자에대한 실망과 절망과 포기의 단계까지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기 시작합니다.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35절을 보면 네번째 아이를 낳을 때 세번째까지는 남편과 연합하리라는 표현의 이름이 계속 나왔지만 유다를 낳을 때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라’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남편의 사랑에 얽매여 있는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허무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집니다.
우리는 남편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 물질, 성공, 인간적인 사랑, 그것을 얻으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기대는 산산조각 납니다. 우리는 한 여자에게서 영적 성숙의 한 단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질 없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것을 붙잡는 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여자가 변했을 때 태어난 아이가 놀랍게도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축복받은 지파의 조상 유다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지파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레아라는 여자를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번째, 여러분이 세상에서 특별히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레아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당신의 과거에 실수가 있고 상처가 있을 지라도 눈물과 통곡과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레아의 기도는 남편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태를 열어주심으로써 응답해 주셨음을 보게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같이 기도하러 갔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열심히 졸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그들이 해도 너무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졸아도 좋으니 기도해라’로 말입니다.
그렇게 했던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몇 달 전에 하나님 나라로 가신 고 곽규석 목사입니다. 부도가 나고 삶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저를 만나서 성경공부를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빚을 갚을 때까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출연료를 받게되면 빚쟁이가 옆에서 기다리다가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던 그는 하나님만을 붙잡았고 철야기도회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분장을 지우지 못하고 의상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밤 11시나 12시에 연예인 교회에 와서는 설교를 듣다가 한번도 예외없이 잠이 들어버립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무척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몇 년을 기도했고 그 기도는 모두 응답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와 목사로 생애를 마치게 되었고, 그의 딸은 목사 부인으로, 아들은 전도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저는 그를 통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졸더라도 기도해라. 통곡하며 드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신다’입니다.
세번째, 레아에게서 배우는 것은 사람에게서 위로와 인정과 보상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된 칭찬과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다면 이것이 복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28장 13절에는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레아처럼 버림받고 무시당했을 지라도 하나님께 꾸준히 나아가는 자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루는 유다지파와 같은 자녀를 낳게 해주시는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라는 역대상 16장 11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리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나가는 자를 하나님은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네 사람 중에서 르우벤 지파를 특별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르우벤은 레아의 첫 아들이였고 야곱의 장자였습니다. 장자에게는 장자의 축복권이 있지만 르우벤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여 장자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창세기 35장 22절은 르우벤의 이런 실수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빌하는 라헬의 몸종이자 야곱의 부인 중에 하나입니다.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사건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이 집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3, 4절을 보면 이 사건을 다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아버지의 마음이 굉장히 상처받고 괴로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역대상 5장 1절을 보면 르우벤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합니다. 르우벤은 장자권을 빼앗긴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장자권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했다가 빼앗긴 에서에 대한 기억 때문에 자기의 큰 아들에게도 이런 수치와 불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야곱의 상처를 다시 건드려서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배우는 또 다른 것은 인간의 족보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족보가 이야기 하는 것이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족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자가 나옵니다. 그 중 한 여자 마리아는 순결한 여자지만 나머지 여자들은 부끄러운 전력을 가진 여자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던 여자이며, 라합은 기생이였고, 룻은 이방인이었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과 간통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족보와 혈통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4절을 보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족보에만 의지하지 않고 학벌이나 지연에도 의지해서 지역간의 갈등을 만들고 학벌을 만들고 족벌을 만들어서 간신히 거기에 의지해서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세우고 자기의 위상을 확인해보려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여러분,
족보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진짜 좋은 가문은 ‘하나님의 가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석

우리는 열두지파에 대한 이야기를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제사장의 옷을 통하여 새로운 사실로 발견하게 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구별된 특별한 옷이 입혀졌습니다.
겉옷과 속옷이 따로 있었고 에봇이라는 겉옷도 입었습니다. 에봇은 금색 실과 청색, 자색, 흰색의 꼬은 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어진 아주 정교한 옷입니다. 앞판과 뒷판으로 구분된 조끼 같은 옷이었기 때문에 앞과 뒤를 연결하는 옥으로 만든 견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보석으로 만든 견대에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장에 두 어깨 위에 열두지파가 있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에봇 앞에도 가로 세로 한 뼘씩 되는 흉패에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두개의 금으로 주변을 싼 찬란한 보석을 박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앞가슴에도 열두지파가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려고 속죄소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제일 앞에 보이고 나아가는 것이 가슴입니다.
르우벤과 같은 자녀가 있는 수치스러운 가족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열두지파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해 주셔서 축복의 열두지파로 삼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열두개의 보석은 각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유다 지파 홍보석(사르디스), 잇사갈 지파 황옥(토파즈), 스블론 지파 녹주옥(카본클), 르우벤지파 석류석(에머랄드), 시므온 지파 남보석(사파이어), 갓 지파 홍마노(다이아몬드), 에브라임 호박(리큐), 므나셋 백마노( 아가페), 베냐민 자수정(아메티트), 단 지파 녹보석(베델), 아셀 호마노( 오닉스), 납달리 지파는 벽옥(야스퍼)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가장 찬란한 보석들을 대제사장의 에봇위에 붙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열두지파를 보석처럼 여기셨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의 가슴에 그 열두지파를 가슴에 품게 하시고, 두 어깨 위에 두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가슴에 찬란한 보석처럼 빛나는 여러분의 이름이 있고 두 어깨에 가장 아름답고 귀한 여러분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쓰레기와 같고, 상처투성이인 나, 과거를 말하고 가정에대해서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배경을 가진 나를 불러서 보석처럼 생각하시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가슴과 두 어깨에 붙이시고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가슴에 품은 보석처럼 생각합니다. 열두개의 보석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빨리 전해주십시오. 여러분은 보석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있는 보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석이라면 더이상 손가락에 보석을 낄 필요가 없습니다. 보석은 우리들인데 어떻게 그런 시시한 보석을 손가락에 낄 수가 있겠습니까. 보석이 있으면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그 보석이 여러분의 가치를 높여주지 않고, 직위를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석같이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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