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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야망과 거짓 (창 30: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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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야망과 거짓(창세기 30:25-43)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은 야망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교활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지성과 교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야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 동안 지낸 후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게 되자 야곱은 라반을 찾아가서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14년 동안 야곱은 순종하며 불만을 표현하지 않고 무상으로 봉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야곱과 라반의 갈등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했다고 하면서 용서했다는 사실까지 기억합니다. ‘이번이 두번째야. 세번째에 또 이러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이면에는 순종한 것이 아니라 분노를 참고 기다리며 지내온 삶이 있습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쌓여간 분노는 어느날 더이상 참지 못하고 터지게 되고 맙니다.

야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4년 동안 그는 분노와 억울함을 억누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여자가 요셉이라는 아들을 낳아 자신감을 얻었을 때 할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찾아가서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는 14년 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지만 그 감정을 억누르며 표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말없이 잘 참는 사람이 있을 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마음속에 분노를 억누르며 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14년 동안 자기가 떠나온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고향에 돌아간들 무엇이 좋겠습니까. 분노하며 저주를 품고 있는 형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 그곳에 돌아가도 행복해지기는 힘들겠지만 그는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뿌리와 본질에 대한 그리움과 힘들고 두려워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야곱에게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야곱에게서 발견하는 또 다른 것은 처자식에 대한 애착입니다. 처자식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북에서 피난온 사람은 가족을 특별히 아낍니다. 믿고 의지할 대상이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철저하게 가족 중심적이고 처자식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은 그가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면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일을 다 알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14년동안 무보수로 일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무언의 언어’를 잘 들어야 합니다. 또 정부는 국민의 ‘말없는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라반은 야곱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열의를 다해서 훌륭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있을 때는 별볼일 없게 느껴지는데 없으면 굉장히 아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옆에 있을 때는 꼭 필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막상 떠나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라반에게 있어서 야곱을 떠나 보내는 것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일꾼이기도 했지만 라반은 그가 떠나면 함께 떠나게 될 자기의 딸들과 외손자들과 가까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처자식을 데리고 떠난다는 것은 라반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27, 28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을 떠나 보내야 될 상황이 닥쳐오자 라반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자신의 일이 잘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뒤 ‘야곱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말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시댁이, 또는 자기의 직장이 ‘나’로 인해 복을 받았다라든가, ‘당신은 복을 가져오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떠나지 말고, 여기 있으라’며 품삯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을 조용히 인내하던 야곱에게 자신의 몫을 챙겨야 되겠다는 야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29, 3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은 ‘외삼촌, 내가 14년 동안 그 많은 수모를 겪으면서 품삯을 받지 않고, 종처럼 살지 않았습니까?’라고 가시 돋힌 말을 합니다. 부리는 사람은 몰랐지만 섬기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욕심과 술수로 가득찬 사람의 내면

그리고 야곱은 ‘외삼촌은 내가 오기 전에는 가난했지만 내가 14년 있는 동안에 부자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자기 덕분에 누군가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나도 고생을 하며 힘써 일했는데 왜 당신이 이익을 다 가져가느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경제 원리와 이데올로기가 이런 식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조아에게 착취를 당한 불공평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의 몫을 가져갈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이런 생각을 바탕에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싫다.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겠느냐’. 이러한 주장에는 일리가 있어서 라반도 이 상태대로는 야곱을 막을 수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교활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라반과 야곱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이지만 사실상 속고 속이며 이해 관계를 따지는 관계였습니다.
31, 32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라반은 야곱이 원하는 바를 수락하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라반은 야곱을 속여서라도 떠나지 못하도록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입니다. 라반에게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것을 챙기고자 하는 야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런 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는 법입니다.
돈을 좋아한다고 말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돈 같은 것은 싫어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떳떳하게 드러내어 주고받지 못하고 몰래 주고 받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내면에 욕심과 더러운 것이 숨겨져 있고 그것을 멋지게 포장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 뿐입니다.

야곱이 제안하는 조건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자신이 앞으로도 라반의 양떼를 돌보겠는데 그 양과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 얼룩진 것, 검은 양과 염소가 태어나면 그것만 자신의 몫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 중에는 흰 것이 더 많고 아롱지고 검은 것은 적기 때문에 라반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선심을 쓰는 척 하면서 허락을 합니다. 야곱의 경우는 모든 것을 양보하는 것 처럼 말하지만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 원래의 모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는 척하기도 합니다. 선교사나 목사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새로와지는 인생

33절을 보십시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야곱과 라반의 관계가 신뢰라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척하고, 사랑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칩니다. 우리 주변에도 겉으로는 잘해주는 척하면서 뒤에서 힘들게 하는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가로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그들은 서로 양보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든지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실속을 차리고 싶고, 자기 이익을 챙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얼마나 교활하고 계산적인 제안을 했는지를 여기에서도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35, 36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그가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계약이 이루어지던 날부터 라반의 발걸음이 바빠집니다. 자기 소유의 모든 양 중 얼룩지고 아롱지고 검은 양과 염소를 골라 자기 아들들한테 주어서 그 양과 염소떼들과 야곱이 돌보고 있는 양과 염소 무리들 사이를 3일 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거리에 떨어뜨려 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에게는 흰 염소와 양만 맡겨 집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라반처럼 그런 과정 속에서도 말은 그럴듯하고 멋있게 하고 약속도 그럴듯하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식으로 20년 또는 30년동안의 오랜 세월을 속고 속이기도 합니다.

양중에서 아롱지거나 검은 것이 있어야 교미를 했을 때 역시 얼룩지거나 아롱지거나 검은 새끼가 나올텐데 그런 것을 모두 가져가버리니까 야곱으로서는 어찌 해볼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야곱은 이런 불가능한 환경 가운데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서 방황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는데 첫날 밤을 지내고 나서 보니 자신의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습니다. 장인에게 속아서 사기 결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장인한테 또 속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은 또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여러분,
사기를 당하는 등 어떤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다시 시작하십시오. 불가능하지만 또 다시 시작하십시오.
37∼3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산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는데 불가능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말도 안되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양들이 물을 먹는 개울가에 세워서 양들이 보게 합니다. 양떼들이 그 물을 먹으러 와서 새끼를 낳으면 얼룩지고, 아롱지고, 검은 것들이 태어납니다. 그것은 유전법칙을 파괴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나무 껍질을 뜯어다가 양들이 먹는 물에다가 놓았는데 어떻게 얼룩지거나 검거나 아롱진 양들이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연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자연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독사에게 물려서 죽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네 지팡이에 구리뱀을 달아라 누구든지 구리뱀을 본 자는 살 것이요 구리뱀을 보지 않은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자연의 섭리를 깨뜨리는 기적

이것은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독사의 독으로 죽게 된 사람에게 해독제를 줘야 마땅한데 구리뱀을 보면 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 구리뱀을 만들어서 들어올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된다라고 생각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구리뱀을 보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이였지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구리뱀을 본 사람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4∼17절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십자가를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생각해 보면 2천년 전에 죽은 한 사람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은 독사에 물린 사람이 구리뱀을 보면 살아난다는 것하고 마찬가지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 구리뱀을 보고 사람들이 살아난 것처럼 지금도 십자가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으니 다행이지만, 2천년 전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한 청년의 이름을 믿으면 자신이 구원을 얻고 천국을 간다는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가 오히려 조금 이상한 듯이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믿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바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구리뱀을 본 자들은 다 살아난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에 구원에 이를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다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처럼 독선적이고 부담을 주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거나 석가를 믿거나 위대한 성현들 중 누군가를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면 마음에 부담이 없을텐데 굳이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니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부담스러운 법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기적을 봅니다. 양과 염소들이 얼룩진 나무에 젖어있는 물을 먹을 때 하나님은 자연섭리 아래에 있는 유전법칙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얼룩진 양들과 얼룩진 염소들과 검은 양과 염소가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40∼4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인간의 야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건강한 새끼가 태어날 것 같으면 그 나무껍질을 갖다놓는 방법으로 결과적으로 라반의 양은 약한 놈들로 자신의 양은 튼튼한 놈들로 채우게 됩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선택이며 약속입니다. 야곱과 같이 정직하지 못한 우리, 겉으로는 헌신하고 의로운척 하면서도 그 안에 탐욕이 있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속아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복을 주셔서 드디어 야곱을 변화시켜서 이스라엘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맑아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며, 여러분에게 욕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또 다시 실수를 하는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어깨와 가슴에 보석처럼 품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즉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고치시고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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