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사람으로 (민 05:5-15)

첨부 1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께 약간 부담이 될 수도 있고 뭔가 껄끄럽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내어쫓는 것이라는 말씀이 현대 교회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말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에 하나 여러분의 기존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에 불과하게 되고, 그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하니라 여러분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날마다 상상 속에서 수많은 것을 만들어내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고, 이루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욕망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만약 인간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루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을 때 상상속에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누리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환상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이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마 10대나 20대의 남자들은 대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될 때 흔히 어떤 상상을 하게 됩니까? 내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상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혹시 예쁜 여학생이 앉으면 어떻게 말을 걸어 가지고 계속 사귈 수 있을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상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연히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예쁜 아가씨가 올라오면 '혹시 내 옆자리에 오는 것은 아닌가'라며 가슴 설레다가 다른 자리에 앉아버리면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부탁하겠습니까? '하나님 제발 내 옆자리에 예쁜 여자가 앉도록 도와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결국 상상 속에 빠져 있던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 주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한 예를 말씀드렸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마귀가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연히 상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현실을 이루어줄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는 항상 쫓아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그 말이 듣기에 거북했다면 그 이유도 결국은 은석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상상,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니는 은석교회가 100명, 200명으로 점점 부흥이 되가지고 예배당도 멋있게 짓게 되는 상상이 있었기 때문에 내어쫓아야 한다는 말이 거북스럽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교회 부흥은 명목은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부흥입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교회 부흥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환상을 철저하게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은석교회에 대한 환상이 있다면 버리셔야 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환상이라도 그것은 인간의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 그러면 좋습니다. 교회 부흥에 대한 환상은 잘못이라고 해도 구제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도 환상이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의 교회냐를 보시는 것이지 어떤 일을 하는 교회냐는 것을 보시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이 가지고 있어야 할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그것이 10:10절까지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뒤에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병이 났을 때 낫게 해주시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멀리 계시다가 달려와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루 세끼 밥먹고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생활하는 그것도 모두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심히 살면서 주어지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 사용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입이 적으면 구제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없으니까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가난하면 때로는 하나님께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난한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많은 구제를 한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이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이 허락하신 마음입니다.

은석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적든 많든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심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은석교인이 한명이든 두명이든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모여서 예배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어쨌든 교회로 불러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로 부르시는 것은 성령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여건과 형편 속에서, 그 형편이 아무리 최악의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이것도 못하면서 뭘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은혜로 살지도 못하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전도하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할 일은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전도하는 놀라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사람과 같이 세상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을 살아가면 무엇을 보여주겠습니까? 신자는 비록 세상 사람과 함께 이 땅을 살고 있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즉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다르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 바로 10:10절까지의 말씀이고 바로 오늘 본문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더러운 자들을 내어보내야 할 이유가 진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가운데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제가 전에 집안에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집안에 어른이 있으면 모든 것은 어른 중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어른이 싫어할 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어른에게 용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어른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은석교회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것은 우리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눈치 보아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은 항상 어리석은 생각만 하게 되어 있고 썩어질 세상에만 관심을 두게 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아예 마음에 두지도 않고 살아갈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신앙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언제까지라는 기약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현실에 대한 조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환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환상을 현실로 바꿔줄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같이 거하는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배후에 계십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돕는 자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저 이웃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안에 함께 거하는 이웃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이웃에게 범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본문 5-10절까지 보면 누군가에게 죄를 범하면 그 죄값을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해서 갚아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죄값을 받을만한 친족이 없으면 죄 값을 여호와께 갚아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죄값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갚아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액수만큼 갚지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주지는 않습니다. 설령 더 많이 갚는다고 해도 그것은 미안함 마음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방금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안에 계시는 모든 백성의 배후에서 후원자로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웃을 해하는 것은 후원자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때문에 시기심에서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으로 등장합니까? 아벨의 편에 서서 가인의 죄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편입니까? 아벨이 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은 세상의 죄로 인해서 최초로 피해를 입은 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 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자의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세상의 죄로 인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나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분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임 속에서는 세상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는 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시기심 때문에, 나의 미움 때문에, 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억울하게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은 자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했거든, 즉 나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있거든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분의 일이라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죄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안에서는 세상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가 일어나면 안되는데 나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가 발생했구나'는 것을 깨닫고 피해입은 자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 때문에 누가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었는가를 항상 살피면서 살아가십시오. 신자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이지 세상 죄로 인해서 서로 피해 입히고 상처는 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교회에서 보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미움이 일어난다고 미워해 버리고, 시기가 일어난다고 시기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있을때, 시기가 있을때 그분의 배후에 누가 계시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구원을 받은 내가 이웃을 미워함으로 여호와께 범죄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자가 발생하지 않는 교회라면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진입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쫓아내는 진의 모습입니다. 큰 교회 되는 것을 사모하지 마시고 이런 교회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1-31절까지 나오는 의심받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부정하여서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든지 아니면 아내가 부정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고 있든지 그 의심을 제사장에게로 가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부정하게 되었을 때는 남편에게는 무척 큰 상처가 됩니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은 아내를 의심하였을 때는 아내된 여인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그러면 그속에서 누가 약자입니까? 누가 세상 죄로 피해를 입은 자입니까? 어느 쪽이든 상처를 입은 자입니다. 아내가 부정하였으면 남편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부정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아내를 의심한다면 이 역시 아내가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판단하지 못합니다. 누가 억울한 자인지 인간이 그 속을 모르는데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16절부터의 이야기는 성막 바닥의 티끌이 어떤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억울함을 당한 자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부정한 일을 했으면 그 여인은 백성의 저줏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인이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도 하나님은 누구편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억울한 자의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항상 억울한 자의 입장에서,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을 보이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