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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난 자 (민 08: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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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러분께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말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사 사람의 지혜로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알아 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달리 강요할 성질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 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지혜로 깨닫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 성령이 일하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그 날까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을 외칠 따름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갈수록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주저없이 하고 싶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국교회를 한 개인이 그런 식으로 매도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만 옳고 남들은 다 틀렸다고 한다'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제가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교회라고 인정하는 모습 안에 들어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이고,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모습에 들어있다면 아무리 스스로가 '우리는 교회이다'라고 외쳐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결국 자기 종교에 도취되어서 평생을 착각 속에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유를 알고 교회로 모이는 것과 모르고 모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이유를 알고 모이고 있다면 그 분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신자로서 할 일을 바로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고 모이고 있다면 그 분은 단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그 이유를 알고 모이셨습니까? 만약 모르고 모이셨다면 오늘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앞서 한국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이유를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교회가 도리어 주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판단이 절대 아닙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가지고 교회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얼마든지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정서에 맞지 않아서 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런데 교회는 이러기 때문에 엉망이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현대의 교회들이 왜 성경에 맞지 않는지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31절부터 보면 마지막 심판때 민족을 분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에 설교를 했기 때문에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거기 보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을 때 민족을 분별하는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천국 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아 영영한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천국갈 자와 지옥갈 자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부인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갈 자고 누가 지옥갈 자입니까? 사람의 기준으로 천국 가고 지옥갈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교회봉사 열심히 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갈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녀도 가라지 같은 신자가 있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교회 일에 관심두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헌금도 하지 않고 기도도 안하는 성도는 가라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전혀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소자에게 어떻게 대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마 25:40절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고 45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이 알지 못한 다른 모습으로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모습이 뭐냐면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작은 자로 변장을 해서 이 땅에 다시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가 주님의 모습을 담은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란 어떤 자를 가리킵니까? 35,36절을 보면 주님이 주리신 적이 있었고, 목마를 때가 있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가 있었고, 벗었을 때가 있었고, 병들었을 때가 있었고, 옥에 갇혔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주님이 이런 모습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습을 가진 자를 내세워서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의 피의 은혜를 아는가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힌 모습은 한마디로 약자를 의미합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란 구약에서부터 등장하는 약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목마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약자입니다. 그리고 이 약자를 선대하는 것은 자신도 곧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약자나 나나 같은 처지라는 입장에서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약자의 모습으로 오시고, 약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결국 약자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담고 게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약자를 대하는 것이 주님을 대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자는 힘있는 자가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약자를 선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이런 점에서는 참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나라들을 돕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약자를 선대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구제는 거의 모두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베푸는 선심이거나 사람의 양심에서 일어나는 동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이렇습니다.

세상은 크고 많고 높은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커야하고 많아야하고 높아져야 가치 있는 것,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많고 높은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교회가 커지고 사람 수가 많아지고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들이 모두 주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실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주님입니다. 이들의 주님은 절대로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 사람으로 구유에서 태어나신 주님이 아닙니다. 이들이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무시합니다. 도시에 있는 큰 교회가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를 조금 보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시골 교회를 자기들의 별장쯤으로 여겨버립니다. 큰 교회 목사는 작은 교회의 목사나 시골 교회의 목사를 무시합니다. 목사가 큰 교회라는 것을 힘의 배경으로 삼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약자의 가치를 알겠습니까? 이들에게 약자는 단지 우리들의 힘으로 도와주어야 할 대상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와줌으로서 자기들은 스스로 보람을 찾고 '역시 우리 교회는 선한 사업을 많이 하는 교회야'라는 만족을 누리면서 한껏 더 높아질 뿐입니다. 내교회, 내것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주님을 모르는 것이고,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한국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저주를 받아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은석교회는 괜찮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은석교회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자신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극히 작은 자, 여러분보다 약한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혹시 나보다 힘이 없고 약하다고 해서 뭔가 무시하는 태도로 대하지는 않는지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그 본성이 힘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없는 자는 무시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아는 신자라면 '나도 약자와 같은 처지인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만큼 살고 있을 뿐이다'는 것을 알고 약자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돕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약자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뭐든지 의무로 생각하면 가식이 나오고 억지가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약자임을 알고 약자를 대할 때 돕고 싶고 나누고 싶은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자를 통해서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문제는 약자가 우리들에게서 하고 있는 역할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으며 우리를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은 말하지도 않고 엉뚱한 마태복음만 가지고 길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잘 기억하시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인을 하나님께 바치는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네가 그들을 정결케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5-13절까지가 레위인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의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요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방법의 하나로서 제물을 흔들어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든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 제물을 바칩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을 요제로 바치라는 것은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만 하도록 구별되어서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전에 레위인에 대해서 설교할 때 드린 말씀과 같이 레위인은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레위인은 처음 난 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난 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난 자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장자, 즉 혈통의 장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에 말씀 드린 바가 있습니다. 17절 뒤에 보면 '내가 애굽 땅에서 그 모든 처음 난 자를 치던 날에 내가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고 하는 말씀을 있는데 이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을 치실 때 맨 마지막 재앙이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살아난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장자 재앙에서 구별된 자이고, 어린양의 피로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처음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난 자, 즉 장자는 장자로서의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을 레위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이 장자의 역할을 위해서 뽑혀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 난 자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계속해서 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납니다. 때문에 장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레위인의 회막 봉사를 통해서 계속 보여지게 됩니다.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 이제는 은혜를 아는 자로서 은혜로만 살아가자'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살아났기 때문에 그 희생을 담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세상은 애굽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심판 속에서 멸망을 받아야 할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처음 난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태어나는 것입니까? 멸망의 자리에서 같이 죽어야 할 자를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살려냈다는 하나님의 일을 아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잘아는 자가 장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갈 때는 그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은혜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평생을 은혜 안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수시로 옛날 애굽의 사고방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에 레위인을 특별히 뽑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이 살아가는 것 같이 살아가서는 안될 신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레위인을 뽑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0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주님이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7:11절에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바램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계속 세상에서 보여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모으신 신자, 교회입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주님의 뜻에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신 뜻이나 주님의 뜻에 함께 동참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 주님과 함께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자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앞서 마태복음을 들어서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자라면 우리에게서는 주님의 모습이 보여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강한 것을 추구하고, 힘을 선호하고, 약해지고 힘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다 죽는 다면 마지막때 가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외침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레위인을 바라보면서 장자가 어떤 자이며 장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 같이,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늘의 평강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의 눈에는 약자가 보여지고 여러분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요제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 같이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레위인의 직무를 위해서 부름 받은 자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것이 거창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아는 자로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힘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힘을 포기했기 때문에 세상과 같이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약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 있는 약자를 바라볼 때 자신도 그와 같은 처지라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약자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르게 나아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배우십시오. 어떻게 하면 교회에 도움이 되고, 같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하나된 지체들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두십시오. 이렇게 사신다면 교회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 기분이 안좋다고 해서 교회를 안나오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장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새롭게 태어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장자라면 가야 할 길은 주님이 가신 길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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