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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명을 좇아 (민 09: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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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자기 스스로 뭔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고, 출세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고 죄가운데 있는 모습이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신자를 죄가운데 있게 하는 것은 겨우 이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사람의 본성을 이용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악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추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잘못으로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선악체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중요한 문제이고 또 신자들이 많이 속는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의 구분을 무엇을 가지고 합니까? 행동을 가지고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어떤 행동을 가지고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은 살인, 강도, 도둑질, 사기, 거짓말, 강간, 뇌물 등등 보편적으로 도덕에 위배되는 것이면 악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반면에 선한 것은 흔히 생각하는 선행,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것들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세상이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종교적인 선을 추가를 시킵니다. 구제, 기도, 주일성수, 성경보는 것, 봉사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르긴 몰라도 선과 악에 대한 규정을 이런 식으로 내려놓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 보는 것을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한 것으로 생각하지 그것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습니까? 기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강조해도 부족할 선이라고 생각하지 기도 안에 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구제나 봉사 선교 등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해도 괜찮고 오히려 강조에 강조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선한 행위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존경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까 여러분이 조심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스스로 뭔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목사로서의 포부를 가지는데 '나는 교회 부흥에 매인 목사가 되지 않겠다. 나는 그야말로 복음만 전하는 목사다운 목사가 되어보겠다'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시다. 이것이 잘못입니까, 잘못이 아닙니까.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전혀 잘못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같이 교회 부흥에 매여서 교회를 자기의 욕심의 도구로 삼아버리는 목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부흥에 욕심 부리지 않고 복음만 전하는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신앙인다운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 생각이 얼마든지 잘못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이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 된 것은 하나님이 되게 하신 것이고, 또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음만 전해라고 해서 목사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 생각없이 복음만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흥에 매여서 목회하는 목사가 싫어서 자신은 그런 목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아래서 부흥을 말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말하려고 한다면 물론 듣는 신자들에게는 유익이 있겠지만 자신은 여전히 다른 잘못함에 빠져있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자기가 스스로 되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이러한 죄에 대해서 지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신자로서 '나는 이런 신자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되고 싶어하는 그런 신자가 되기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제는 선한 것이지만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구제한다면 결국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구제이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구제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울타리 외에 여러분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든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가령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도 이런 포부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직업이 회사원이라면 나는 신자니까 회사에서 본을 보이는 이런 사람이 되야지라는 생각가운데 아랫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상사에게 순종하고 회사 일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또 교사라면 '나는 신자니까 이런 교사가 되야지'라는 포부를 가지고 자기가 생각하는 신자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고, 간호사면 간호사대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환자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신자로서 가지는 시어머니상, 며느리상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항상 신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자신이 원하는 어떤 모습이 되기 위한 행동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뭔가 되기 위해서, 뭔가 만들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록 행동은 선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선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TV를 보면 여러 가지 캠페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환경을 보호하자는 것, 이웃을 돕자는 것, 며칠 전에는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뒷사람을 생각해서 문을 닫지 않고 기다리는 작은 배려를 하자는 캠페인을 봤습니다. 물론 그런 행동들은 다 좋은 행동들입니다. 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행동을 요구하는 이유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즉 뭔가 되고,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할 뿐입니다. 이것으로 다 된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지 행동 자체가 선이 아닙니다. 행동은 단지 말씀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없으면 말씀을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행동할 뿐이고, 때문에 행동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라 선을 담고 있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선이 되는 것이 있고, 악이 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즉 구제를 해도 같은 구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은 유월절에 대한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어야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보다는 내가 원하는 인간으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담는 하나님의 그릇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내것을 담아 놓고 살아가는 나의 그릇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수시로 말씀과 상반된 모습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인도는 쉬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교육입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삶자체를 도우시고 편안하게 하시기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우리 생활을 편안하고 손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인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말씀으로 인도 받는다는 것도 자기 생활의 편안함 쪽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품고 있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도우시는 인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결과로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신앙의 열매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 만들어져 가는데는 수많은 세월과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그순간 당장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자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신앙 생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인도함 받으면서 살아가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단시간에 신앙을 이루어서 그 신앙으로 평생을 우려먹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신앙을 키우려고 산기도도 하게 되고 철야기도며 금식기도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만들자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성막을 덮었다고 합니다(15절). 출애굽기 13장에서는 이것을 기둥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막 주위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볼 수 있도록 높은 기둥의 모습으로 떠오른 것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많은 목사님들이 구름기둥은 낮에는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준 것이고, 불기둥은 밤에 춥지 않도록 히터를 틀어주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고 하면서 이런 좋으신 하나님인데 우리들의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의지하고 기다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연 불기둥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춥지 않고 덥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있게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에는 잘 보이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의 모양으로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불기둥 구름 기둥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불, 구름 기둥이 움직이는 것은 단순한 기둥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 기둥을 따라서 움직인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불기둥만 바라보고 움직입니다. 다른 것은 전혀 보지 않습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머무르게 하는 것은 오직 두 기둥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이 중심입니다. 기둥이 움직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좇아서 기둥을 따라서만 가는 것입니다. 기둥이 가면 가고, 서면 서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구름이 머무르면 그 기간이 얼마가 되든지 자신들도 머무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옛날 이스라엘 백성같이 구름기둥, 불기둥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했던 기둥의 역할을 지금은 말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대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그 외에 다른 목적과 의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계셔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전에는 가만히 계십시오. 여러분이 설치면서 움직이는 것은 전혀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할 일은 여러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믿음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인간편에서 만들어 내가지고 하나님께 자랑하듯이 내보이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계산해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자기의 열심으로 약속을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또한 사울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모두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기름지고 좋은 것은 남겨가지고 온 것을 잘 압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간의 열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칭찬하셨습니까?

믿음은 우리의 열심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년동안이나 구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인도가 멈춘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 자기들의 생각을 앞세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얼마가 되든 구름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구름이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달이면 한달, 이렇게 규칙적으로 움직였다면 아마 이스라엘은 구름을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시간만 계산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구름은 바라볼 필요없이 시간만 되면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이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 안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지시를 받는 것이 마땅한데도 말씀을 바라보지 않고 제멋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스스로 어떤 규칙을 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주일 되면 교회 나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십일조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때워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말씀을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보는 것도 신자의 규칙상 보는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삶은 여러분이 과연 말씀대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실습의 현장입니다. 뭔가를 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주어진 모든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지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신자다운 신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설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만 사십시오. 그러면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는 무한한 행복의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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