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팔을 불라 (민 10:1-10)

첨부 1


여러분의 지금 인생은 행복합니까 행복하지 못합니까. 아마 어쩌면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분이 있을 것이고, 행복하다가도 순간 불행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평생토록 불행을 느끼지 않고 행복만을 맛보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지금 행복을 기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할 때도 행복에 모든 목표를 두고 행복을 기대하고 행복을 꿈꾸며 결혼합니다. 하지만 행복이란 하늘로 날아가는 고무풍선처럼 결코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불행을 느낍니다. 행복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반면에 불행이란 자기가 원하는 행복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행복이란 순간이고 불행은 계속 지속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사람의 욕구라는 것은 무한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움으로서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 행복이 존재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평생토록 행복이 아니라 불행 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스스로 뭔가 되어지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문제이든 교회 밖의 문제이든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스스로 뭔가 되어지려고 하는데서 이미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뭔가 되어지려고 한다는 것은 어떤 목표를 세워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람은 그 목표를 위해서 일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목표가 이루어짐으로써 행복을 느끼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이 어떤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누군가가 성경을 일년에 한 번을 봤다고 한다면 '나는 두 번을 보겠다'는 식으로 목표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보다 뛰어나겠다는 욕구를 가지고 목표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더 예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예뻐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자신보다 날씬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날씬해지려고 힘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다 자기보다 못난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예뻐지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다 자기보다 뚱뚱하다면 날씬해지기 위해서 수고를 하겠습니까?

결국 스스로 뭔가 되어보려는 것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다 경쟁의식 속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스스로 뭔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만 살아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환경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상태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면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혹 행복을 환경에 둔다면 그 행복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환경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행복의 조건을 돈이든, 자식이든, 직장이든 눈에 보이는 것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돈에 행복을 두면 돈이 사라질 때 행복도 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자식에 행복을 둘 때 그 자식이 사라지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으로 커갈 때 행복도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경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못생겼으면 못생긴 대로 뚱뚱하면 뚱뚱한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그렇게 하나님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항상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여러분이 세상을 힘들게 살고 계신다면 그것은 모두 여러분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환경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를 주시면 둘을 원하는 그런 악한 인간들입니다. 절대로 하나를 가지고 만족을 못합니다. 둘을 주시면 둘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셋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셋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신대로 살아라'입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신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형편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 주위에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만 없으면 행복하겠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수두룩하고 그것 때문에 서로가 잘난 인간 되려고 싸우며 살아가는 세상인데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죄악가운데 있다는 증거는 서로가 잘났다고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왜 행복하지 못하나? 나는 왜 불행하나? 하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이 느껴지는지 그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원인은 세상의 죄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는 하나님같이 되어 보려고 했던 것으로 시작하는데, 결국 자기 스스로 뭔가 되어 보려고 했던 그 욕망 속에서 자기보다 잘난 인간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시기가 드러나게 되고, 그 시기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모습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아벨보다 더 못하나'라는 자존심의 문제였으며 그로 인한 시기심, 그리고 시기심으로 인한 미움이 아벨을 죽이게끔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죄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잘대해줄 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원망과 섭섭함과 시기심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느끼는 마음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가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기심, 미움, 경쟁,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죄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칙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딱 한 마디로 말해서 희생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희생이지 사실 희생이라는 말안에는 섬김, 사랑, 양보, 용서 이 모든 의미가 다 담겨 있는 것이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희생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생이라는 말에는 왠지 부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습성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가지기 위해서 힘쓰며 살았지 나에게 있는 것을 남을 위해서 나누는 삶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있는 힘을 모두 나를 위해 허비하면서 살아왔지 남을 위해서 나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부담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남주라는 말에는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죄인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남을 돕는데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세상은 모두 자기를 위해 살아가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힘을 모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힘을 모으려고 하지 말고, 혹 힘이 있거든 남을 도와주고 베풀고 사랑하는데 그 힘을 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도와주는 보람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힘을 포기했기 때문에 자기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경쟁도 시기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를 고통으로 끌고가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힘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며 살게 되면 결국 힘을 가진 자를 시기하게 됩니다. 미워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시기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시기를 버리고 미움을 버리려고 한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힘을 부러워하는 속성에 빠져 살아간다면 결코 시기와 미움 안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사는 지혜는 주어진 힘을 자기를 위한 힘으로 사용하지 않고 남을 위한 힘으로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것을 왜 남을 주며 사느냐'는 생각은 버릴 각오를 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신자로 사시기를 원하시고 마음의 짐을 덜어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이 지혜를 배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힘으로 사는 것이 죄가운데 있는 모습임을 깨닫고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 무엇이 우리에게서 버려져야 하는지도 분명히 하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기를 소원하고 나와야 합니다. 말씀에 충성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을 불어라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불기둥, 구름기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둥만 바라보면서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는데, 나팔을 불어라는 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 나팔의 기능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2절을 보면 소집과 진행의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데에는 이 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9절을 보면 대적을 치러 나갈 때도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희락의 날, 정한 절기, 월삭에도 나팔을 불게 되어 있는데 그때에는 번제물과 화목제물 위에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말씀들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팔을 불어라는 것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길을 진행하기 위한 용도로만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대적을 치러 나갈 때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고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나팔을 부는 데는 단순하지 않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그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나팔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19장입니다. 13절에 보면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보면 나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산 앞으로 불러모으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팔이 여호와의 음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그 나팔 소리를 여호와의 음성으로 듣고 그 소리에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뢰나 번개나 빽빽한 구름이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나팔 소리가 있는 것은 나팔 소리도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19절에 보면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고 하는 말씀을 봐도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18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난 뒤에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19절)라고 한 것을 봐도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나팔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나팔을 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리게 하신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나팔을 불어라는 것은 이제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로 부는 나팔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나팔을 불면 모이고 진행했던 것은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말씀의 지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대적과 싸울 때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싸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것을 우리가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의 원수와 싸울 때 나팔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듯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도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질병이 여러분의 대적입니까? 돈이 없는 것이 여러분이 대적입니까? 세상의 힘든 일이 여러분의 대적입니까?

우리의 대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 대적이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병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가는 것입니까? 돈이 여러분을 멸망으로 끌고 갑니까?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가는 것은 질병 자체가 아니고 돈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추구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가고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 옛사람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팔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즉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찾습니까?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대적은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괴롭고 어려울 때 나팔을 부십시오. 하지만 단지 여러분이 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나팔을 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짐이 있다면 그 짐이 무엇 때문에 있게 된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고 계신 짐은 모두 외부에서 누군가가 지어준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진 마음의 짐입니다. 환경이 절대 짐이 아닙니다. 죄가운데 있는 결과로 지워진 마음의 짐입니다. 욕심으로 살려는 것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남과 비교하면서 자연히 지워진 짐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해결 못합니다. 그럴 때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힘을 버리게 하십니다. 하지만 힘을 버리고 살아가는 그것이 신자에게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해로운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힘으로 삼고 있고 행복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돈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과연 돈을 주시겠습니까? 돈이 힘인 사람은 돈이 있으면 더 교만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자존심으로 사는 사람에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을 주신다면 그것은 더 해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주어진 은혜대로 살아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돈에 힘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그런 신자는 처음부터 돈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있든 없든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있으면 남을 도우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돈에 욕심을 버리려고 하는 미련한 신자는 없을 줄로 압니다. 욕심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겠나라는 기대가 이미 욕심 가운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 제물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합니다. 번제물 화목제물은 모두 희생을 의미합니다. 즉 제물 위에서 나팔을 불어라는 것은 희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생의 하나님을 찾지를 않습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희생하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데렐라가 되고 백마 탄 왕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신데렐라가 되고 백마 탄 왕자가 되는 것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신데렐라로 만들어 주시는 마법사도 아니고 백마 탄 왕자가 되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를 희생하는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희생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서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시고자 하시는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힘이 되는 것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행복한 인생을 원하시고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마시고 버리기 위해서 찾으십시오. 우리 속의 옛사람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 되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 섬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런 신자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나팔을 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찾아오셔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