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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원망 (민 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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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새로운 것을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소유하게 되면 '좋다'는 느낌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른 새로운 것에 눈길을 돌리며 그것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상대방의 것이 자기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고 하는 것일까요?

남녀가 깊은 사랑을 했다고 할지라도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다른 이유도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는 평생을 자기의 아내가 될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랑하며 살 것 같았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러한 느낌이 식어져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내에게서는 더 이상 새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 가졌던 신비스러움들을 모두 알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아내는 새로운 존재로 자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아무개 부인은 남자에게 화장 지운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더라' '당신은 항상 자다 깬 것 같은 부시시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 '아무개 부인은 애교가 철철 넘쳐흐르더라' '아무개 부인은 그렇게 깔끔하던데 당신은 이게 뭐냐'는 식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아내에게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또 결혼하고 나서도 얼마동안 그런 모든 모습이 좋아 보이고 아름답게만 보였는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아름다움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단지 다른 새로움을 요구하는 자신의 욕구가 불평이라는 모습으로 상대방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머리 모양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바꾸기도 하고, 옷도 유행을 따라서 새로운 것을 입으려고 합니다. 돈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가전 제품을 쉽게 바꿉니까?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지 못할 때 그 원망과 불평이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남편이 반찬 투정을 하면 '남들처럼 돈만 많이 벌어와봐 날마다 임금님 수랏상같이 해줄테니' '남들은 남편 잘만나서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면서 사는데 나는 당신 만나서 이모양으로 산다' '아무개집 남편들은 부인 데리고 외식도 자주 간다는데 당신은 이날 평생 외식한번 제대로 시켜줘 봤나?' '아무개집 남편은 부인 생일이면 꽃도 선물하면서 무드가 있던데 당신은 지금까지 나한테 꽃 선물해준 적이 있나'하면서 바가지를 긁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만 가지면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소유하고 나면 다시금 허탈감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전도자가 한 첫마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1:8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솔로몬이 왜 인생에 대해서 허탈감을 가졌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만물은 항상 새로움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심정은 우리가 솔로몬처럼 되어보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평소의 삶을 곰곰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것을 쫓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소유하면서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과연 거기에 행복이 있던가요? 새로운 것을 소유했을 때 행복이 있던가요?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욕망에 따라 새로운 것에 대해서 목말라하며 살지만 해아래에는 새로운 것이란 없기 때문에 결국 평생을 만족은 전혀 모른 채 목말라하며 살다 죽는 서글픈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만족이 없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원망하다가 불평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옵니다. 교회에 오면 행여 새로운 것이 있을까라는 기대감속에 교회를 찾았더니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환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새로움에 빠져서 재미있게 교회생활합니다. 교회 가는 것이 즐겁고, 주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삽니다. 교회의 모임이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기존의 신자들은 처음 나온 사람이 신앙이 참좋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생활이 시들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인들에게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여기저기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것이 없나 하면서 기웃거리게 됩니다. 가게(교회)가 새로운 상품(교회 프로그램)을 진열하지 않으면 손님(교인)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 교회 돈을 써가면서 여기저기 다니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이 인기가 있다고 하니까 수십 만원의 돈을 들여서 제자훈련을 배웁니다. 큐티라는 것을 보급해보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관심둘 거리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총동원전도주일, 40일 특별새벽기도회, 양로원 방문, 고아원 방문, 찬양집회, 은사부흥집회, 환경운동, 등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러한 프로그램에 시들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목사를 원하게 됩니다. 목사에 대해서 식상해진 것입니다. '모 교회는 목사가 능력이 있어서 몇 년만에 3배로 부흥했다더라' '아무개 목사는 인품이 좋다더라' '저 교회 목사는 심방을 잘한다더라'고 하면서 은근히 목사에게 압력을 넣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좀 해봐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단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결혼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고 좋아만 보이던 것이 결혼 후에는 견딜 수 없는 단점으로 보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오면서도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자신의 자아 실현과 만족을 위해서 오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에게 은혜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해도 마음은 냉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도 마음은 요지부동이고, 천국을 말해도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세상이 굴러다니고, 마음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데 대한 불평과 원망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러한 원망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도 원망을 합니다. 어떤 원망입니까? 고기가 없고 애굽에서 먹었던 생선, 수박, 부추, 파, 마늘 등이 없다는 원망입니다. 이런 것이 없어서 정력이 쇠하여 졌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원망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쓴물 때문에,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마실 물이 없는 것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가 있습니다. 즉 본문의 원망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하는 원망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음식이 있습니다. 꿀섞은 과자같이 맛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싫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만나만 먹고 고기, 수박, 생선, 파, 마늘을 먹지 않으니 몸에 힘이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애굽에서 먹던 것이 생전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에 있었고 먹어 보았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만나에 질리자 옛날 애굽의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좋은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은석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집사님 한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의 말투가 너무 무뚝뚝해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을 부드럽게 하도록 고쳐줄 수 없느냐는 다른 교인들의 요구사항을 저에게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졌습니다. 서글퍼지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은석교회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4년 이상을 은석교회에서 오직 십자가만 전했으니까 그래도 교인들이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타교회의 목사들이 외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설교를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 부흥이나,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에는 전혀 관심두지 않고 그저 죽으나 사나 십자가만 전하는 설교를 가만히 듣고 있는 교인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는 신자들이 뭔가 복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환상을 하나님은 여지없이 깨뜨리시면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철저하게 빼앗아 가버리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까? 지금까지 모든 힘을 쏟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하나님에 대해서 분간도 하지 못하고 믿음에 대해서 판단을 하지 못합니까? 도대체 지금까지 뭘하면서 신앙생활한 것입니까? 결국 여러분은 지금껏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 만족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 대해서 싫은 소리한다는 것이 저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모습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목사에 대해서 새로운 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에는 식상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는 목사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성격을 고치고 무뚝뚝한 말을 그야말로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말로 고친다고 합시다(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고쳤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의식한 가식이고 위선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얼마가지 않아서 목사에게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요구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무뚝뚝함을 굳이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무뚝뚝한 성격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목사의 인품 때문에 교회에 왔다면 그 사람은 목사를 믿고 목사를 의지하게 되고 목사를 통해서 신앙의 만족을 누리려고 하지 예수님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인품을 통해서 교인을 교회에 붙들려고 합니까? 그것을 전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을 교회에 붙들어 놓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교회로 끌어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만 확실하게 전한다면 그리스도만 확실하게 전한다면 전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전하느냐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사람을 붙드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목사의 말투에까지 시비를 걸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사람의 일로 여기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사람을 붙드냐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되고, 결국 인간관계를 통해서 교인을 붙들려는 발상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위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는 것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내 기분을 채우고, 내 마음을 풍족케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원망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적이 소유나 여러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기분좋은 말이나 칭찬들이 다 헛된 것인줄 모릅니까? 목사의 부드럽고 상냥한 말이 여러분을 천국 보내는 길이라면 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고치겠습니다. 하지만 목사의 말투가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는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고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목사에게 헛된 기대를 겁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목사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저에게 걸 기대는 단지 복음뿐입니다. 저에게서는 오직 복음만 찾으십시오. 누가 여러분을 멸망의 자리에서 구해주시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입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단지 여러분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전혀 가감하지 않고, 인간의 욕심도 보태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께 하는 전도요, 오늘도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부추, 수박, 생선, 파, 마늘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관심이 온통 이런 것으로 가득차있는데 눈에 하나님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그들에게 다가가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오셨고, 여러분이 눈뜨고 바라보는 자연 환경을 통해서도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꽃 한송이에까지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지나쳐 버립니다. 자연을 그냥 자연으로 보고, 꽃을 그냥 꽃으로 봐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머리속에 다른 관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목사에게 다른 기대를 거는 이상 저는 그 기대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힘 쓸 것입니다. 목사라는 인간을 보지 않고, 목사라는 한 인간을 통해서 여러분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모든 기대를 거는 여러분이 되도록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은 연예인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다음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은 시장터에 사이비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분과 만족을 위해서 교회를 찾지 마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위문공연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만 신뢰하십시오. 세상에서 새로움을 찾지 마시고 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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