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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의 원망 (민 1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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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원망 (민 11:10-15 )

흙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지금 이시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피가 우리의 온 몸을 돌고 있다는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게 하는데 우리는 전혀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가슴에는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의지로 뛰고 있습니까?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 심장이 뛰고, 피가 돌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나에게 일하시고 나를 돕고 계신다는 증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후로 세상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습니다. 세상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한데 하물며 세상만물의 극히 작은, 먼지 같은 우리들의 존재여부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존 여부도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사는 것이요 죽이시면 죽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살려고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기 스스로 꿈꾸면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스스로 괴로워하고 고통 속에 빠지며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원망을 신에게로 돌립니다.

사람은 자신의 괴로움의 원인을 모두 외부에 두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의 조건이 외부, 즉 환경에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괴로움을 느끼는 환경 속에서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괴로움이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를 괴롭히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하나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힘도 없는 인간이 자기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주관하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주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 마십시오. 자신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이든 어떤 모습이든, 그 인생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자신에게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성격은 이랬으면, 외모는 이랬으면, 가정 환경은 이랬으면 하는 부분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만으로 이어지고 괴로움으로 이어지고 시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고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볼 때는 부족함 투성이인 것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게 되고, 결국 엉뚱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시비 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재 자기의 인생, 자기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를 감사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결국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 자신의 원하는 모습과 현재의 것을 비추면서 괴로움과 원망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좀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란 따로 없습니다. 외모도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미스 코리아에 나가서 1등한 것하고 하나님의 영광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격 또한 하나님의 일과 상관이 없습니다. 소위 신자다운 성격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아시고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신자로 살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단순한 불평 한마디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울었더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관하려는 애굽의 습성 때문이었습니다. 살려주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습성 때문에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그들은 인생의 즐거움이 없다는 것에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즐거움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먹었던 것들입니다.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경도 좋고, 말씀도 좋고, 믿음도 좋지만 그래도 세상 것이 좀 있어야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지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세상 것이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들도 말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즐거움을 말하지만 정작 즐거움은 세상 것을 소유한데서 얻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즐거움이 다 헛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했습니다. 죽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꼭 죽어봐야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면 미리부터 그러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며, 세상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평안과 즐거움으로 삼고 인생을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갑부나 권력가도 죽음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돈, 권력이 죽음에서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십니까? 아름다운 모습에 만족하며 삽니까? 팔팔한 건강에 만족하며 삽니까? 돈이 있고 좋은 집이 있고 좋은 차가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삽니까?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삽니까? 여러분, 자기의 모습을 죽음이라는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싸늘하게 식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여러분을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것을 안다면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 순간 여러분의 머릿속은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하고, 여러분의 마음은 천국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주님을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머릿속에는 애굽의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데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방법이 세상 것을 통해서 만족을 누리고 즐겁게 사는 것 하나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영원히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외면하고 삽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셔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심장은 자동적으로 당연히 뛰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모든 관심을 돈에만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가 있고 세상을 얼마든지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차 있으니 하나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항상 불평과 원망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만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모세까지도 원망을 합니다. 모세의 원망은 무엇입니까? 1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나이까 라고 합니다. 또 15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지금 모세의 불평은 이 백성들은 다 하나님 백성인데 왜 나에게 맡겨 가지고 나를 이 고생을 시킵니까? 차라리 이렇게 할바에야 나를 죽여주는 것이 내게는 은혜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불평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도 아주 심한 원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원망에서 모세의 어떤 잘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지금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 받고, 또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하나 예수 잘 믿고 천국가면 되는데 내가 왜 다른 신자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하느냐는 식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붙여주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세는 아마 자기 혼자라면 얼마든지 이 고생 안하고 편안하게 하나님 믿으며 살 수 있는데 괜히 지도자로 앞장 서가지고 안들어도 될 원망을 듣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원망은 목사들에게서 흔히 보여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잘되고 교인들이 목사 대접 잘하고 떠받들면 하나님 저를 목사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만 교인들이 목사에게 등을 돌리고 분란이 나고 목사에게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세요 라고 할 때 목사는 하나님 왜 나를 목사 되게 해서 이 고생을 하게 합니까? 라는 원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 안되고 그냥 직장이나 다녔으면 내 신앙만 잘 지키면 됐을 것인데 괜히 목사가 되가지고 남의 신앙까지 간섭을 해야 하고 염려를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

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사는 하나님이 왜 자신을 목사로 세우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를 내세우신 것은 단지 모세의 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인도하심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할 모세는 자기의 힘을 드러내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드러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만 들고 백성들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뭡니까? 모세는 아무것도 배우는 것 없이 지도자 역할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대로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토록 하나님께 원망 잘하고 불평만 내세우는 그런 백성들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세도 같이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한몸에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이 언제나 목이 곧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올 때의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목사를 여러분과 다른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누군가를 목사로 삼으신 것은 그 사람이 위대해서도 아니고 신앙이 특출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목사를 해야만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달아갈 수 있고,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목사를 시킨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는 고생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고생을 하나님 때문에 애매하게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그러한 고생을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고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대우받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목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자기만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멸망으로 끌고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하나님이 자신을 목사로 세웠다고 우기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그런 목사들로 인해서 교회가 엉망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목사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사가 왜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목사가 힘든 것은 자기 신앙뿐만 아니라 남의 신앙까지 간섭하고 생각하고 염려를 해야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통을 체험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되어 있는 목사인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들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고 그들을 위해서 열심히 앞장서고 있는 모세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세를 지도자라는 입장에 세워놓고 목사의 얘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원망이 소위 목사라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평신도라고 말하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국한되는 말씀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목사와 평신도를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서야 목사가 있지만 교회 밖을 나가면 여러분들이 목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베드로전서 2: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일한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제가 목사라고 해서 다른 특별한 은총, 특별한 신앙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동일하게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냄을 입은 자들입니다. 왜 우리를 빛으로 불러 내셨습니까? 베드로는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합니다.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 즉 우리의 구원자의 아름다운 덕,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이신 희생을 선전하라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일을 하는 자를 가리켜서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결코 어떤 직책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은석교회의 목사는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각가정에서 목사의 역할을 해야 하고,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목사, 곧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란 세상이 생각하는 것 같이 어떤 집단의 성장 발전을 위해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이야 나라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전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역할을 하기를 꺼려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적당한 선에서 끊으려고 합니다. 손해가 없을 정도에서, 고난이 없는 정도에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을 그러한 힘든 상황으로 집어넣으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그런 상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더 깊이 느껴라고 하신 것임을 아십시오.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께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원망을 통해서도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애매한 고난으로 여기며 원망과 불평을 해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신앙만 잘 지키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린 모두가 내 편한 것만 원했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관심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예수를 따라가도 단지 내 교회 교인이 줄어든다는 것만 서운해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옛모습을 알아야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바로 알려줄 수 있습니다. 나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이 옛사람의 모습인데 자신의 애굽적인 모습도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리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소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을 보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말하기 때문에 올바른 죄를 지적하지 못하고, 생명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신자의 필수과목입니다. 복이 있는 자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목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장로를 보고 신앙생활 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면 이스라엘과 같은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20년 30년이 넘게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목사가 시킨 대로하

려고 하는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헛믿었기 때문이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성경적인 것이 아닌지를 바로 판단하고 성경적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에 매이지 마시고 노회에 매이지 마십시오. 목사든 노회든 성경과 어긋나는 것을 요구할 때는 그것을 지적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앙입니다. 성도가 서로 만나 대화할 때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할 때 거기에 쉽게 쏠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원망은 이스라엘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먼저 탐욕을 품음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아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같이 따라나온 이방민족인 것 같습니다. 이들이 불평을 하자 뭔가 내심 불만이 있던 이스라엘이 거기에 동조를 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성경을 기준으로 두고 하십시오. 누군가가 잘못된 말을 하면 그것을 지적해 줄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를 기준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교인과 하나님 사이에 목사가 끼어 있으면 안됩니다. 장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님도 교인들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목사에게 불만인 사람들은 장로님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장로님은 옳고 그름의 판단도 없이 교인들에게 끌려갈 때 그것이 교회를 잘못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면 신앙생활 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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