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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자와 죽은자 (민 14: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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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종교적인 문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즉 교회에 나오는 것을 '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라는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찾아 나오는 것과 기독교라는 종교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을 향해서 '저들의 종교는 기독교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분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로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들어온 여러분들이라면 믿음과 종교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서의 기독교는 분명 하나님과 연관이 있지만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귀가 제공하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푹 빠져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이는 것입니다. 종교에 매이게 되면 하나님을 전혀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단지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만을 머리에 담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우린 지금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상을 섬기는 인간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공통점은 자기를 위한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신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이 말하는 신은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좋아하고, 그 가르침대로 착하고 바르게 살면 그 대가로 세상에서 복을 주고 죽어서도 살기 좋은 나라에 들여 보내주는 신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모든 종교를 보면 신의 가르침과 인간의 생각이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이 원하는 것을 인간편에서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교리적인 문제를 접어두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불교라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선한 것이 동일합니다. 또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악도 동일합니다.

여러분이 '나는 기독교인이다'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각과 틀린 것이 있습니까? 인간의 상식에 어긋난 가르침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 세상의 그 누구라 할지라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상식과 소원에 일치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각각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를 말하면서 '인간은 한 혈통'이라는 것만 생각하지만 사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하나를 말합니다. 인간의 죄는 인종, 민족, 시대, 모든 것을 초월해서 동일합니다. 인종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죄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 아담의 죄가 지금 이 시대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죄가 그대로 보여진다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된 본질적인 동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같은 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비록 종교가 다르다고 해도 보여지는 죄는 같으며, 같은 죄의 본질 속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고 선호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같은 것을 추구하고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며 죄에 대한 징벌이 있고 선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죄와 선도 종교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죄를 말하고 같은 선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상식과 일치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한 종교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인데 자기 중심인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면 그 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상식과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종교 문제를 길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기독교가 종교화되는 것을 아주 많이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기독교가 점차 종교화되어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종교화되어 있는 기독교에서 종교의 틀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단지 인간의 야망만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영생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 대한 약속만 보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일치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거부하고, 인간의 생각과 모든 상식을 부숴 버리는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으로서의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와 전혀 공통점이 없으며 오히려 그런 인간의 종교를 고발하고 심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은 오직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바른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착하고 바르게 살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착하고 바르게 사는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여러분께 다시 한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상식 선에서 이해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한다면 굳이 성령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식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지혜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상식이나 지혜는 모두 무시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인간의 상식이 떠나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고, 하나님도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셨다면 제일 먼저 여러분의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도 아울러 명심해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이 만들어 낸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즉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하나님 아닌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신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신에 도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일본에는 사이버 인간(여자)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버 인간이란 인간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가상으로 만들어 낸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컴퓨터 상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앞으로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까지 하게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조작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상 인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모습으로 얼마든지 가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그 가상 인물인 사이버 여자를 사랑한다는 남자까지 나설 줄도 모릅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상 신을 신으로 여기며 섬깁니다. 그리고 그 신이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자기들을 도와줄 것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신이 먼저가 아니라 언제나 인간이 먼저입니다. 인간을 위한 신이고 인간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양보해야 하고, 인간의 소원에 하나님이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틀 안에 있는 현재 기독교의 실상 그대로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은 없고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종교의 틀을 벗자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식에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저는 여러분을 전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생명의 길에 대해서 소개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데 있다면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을 말씀 드려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가 있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을 정탐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인간의 상식으로 믿었습니다. 대장부같이 힘센 사람과 힘없는 약한 사람이 싸울 때 힘없는 자가 진다는 것은 인간 상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상식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인간의 상식을 무시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상식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상식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들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중 누가 죽고 누가 삽니까? 37,38절을 보면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33절의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보면 나머지 백성들도 40년동안 서서히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살리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이시는 하나님도 같이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만 남겨 놓으시고 나머지는 다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자가 죽고 어떤 자가 사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인간은 자기 상식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상식이 앞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 것도 자신은 안된다고 소리칩니다. 하나님은 버리라고 하는데 자신은 버릴 수 없다고 버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상식과 부딪히는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끝까지 자기를 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상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제 아무리 믿음의 열심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상식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하나님은 전혀 마음 두지 않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39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듣고 자기들이 범죄 했다고 소리치면서 아말렉과 가나안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인과 싸우겠다고 쳐들어갔는데 하나님은 왜 함께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 가나안 땅을 차지하느냐 차지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되었느냐를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가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단지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를 원하신다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단결해서 가서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땅을 차지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신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신의 흉내를 낸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식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해서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살려주신 그런 인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말씀에만 순종하는 인간만이 삽니다. 내 상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간, 그런 인간만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인간의 힘을 모아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종교사업을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 매달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습니다. 만약 그 누구라도 이 원칙에서 벗어난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보기에 선하고 교회에서 크고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자는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그 원칙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원칙은 인간이 자신의 힘과 노력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고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이 원칙 안에서만 기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그것은 생명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한낱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원칙대로 움직이고 살아가야 할인간입니다. 이 원칙을 따라 살지 않을 때 그 결과는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잃어버린 원래의 안식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상식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앞세우고 있는 결과를 잘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앞세우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힘과 능력을 앞세우면 자기보다 힘이 세고 능력이 많아 보이는 상대 앞에서는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지 마십시오. 인간이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일이 이루어지는 모든 계획과 방법까지도 내 생각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인간 종교와 다른 점도 이것입니다. 인간 종교는 모두 자신의 소원을 들고 신을 찾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까지도 다 자기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기만 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방법이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편하고 좋은 방법으로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엄청난 장애물을 우리 앞에 두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힘으로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싸움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구할 뿐입니다. 울음이 나오는 순간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종교의 옷을 벗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종교의 틀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의 뜻은 무시한 채 인간의 소원과 경험과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제멋대로 지어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모두다 교회의 성공을 원하고, 윤리와 도덕적인 인간, 양심적인 인간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 신자로서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은 도덕이든 윤리든 양심이든 다 자기 유리한대로 이용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만약 누가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말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자신이 도덕과 윤리와 양심 때문에 해를 입어야 할 상황에서까지 그것을 주장하고 내세우는지를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상식과 경험은 다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힘 쓸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머물러 살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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