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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은 지팡이 (민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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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지팡이(민 17:1-13 )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을 가리고 있는 모든 옷을 다 벗은 채 나와야 합니다. 실제 옷을 벗고 나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다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대로 하면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보시고 계시는데 실상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을 바라볼 때 아무 부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주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세상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세상의 조건들 때문에 자신들의 실상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세상의 조건들이 아무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고 스스로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을 주셔서 남들 앞에 기죽지 않고 당당히 나설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조건을 벗긴 채 라오디게아 교회를 바라보셨습니다. 부요한 것, 그들이 부족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준 세상의 모든 것을 벗겨버린채 그들을 바라보신 주님의 눈에 비춰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다시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신가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기십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잘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곧 지금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많은 것들이 입혀져 있습니다. 누가 입혀준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입은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 단점, 부끄러운 부분을 적당히 가리워 줄 뭔가를 걸쳐 입습니다. 그것은 지식일 수 있고, 도덕일 수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종교 행위일 수 있고, 아름다운 외모일 수도 있고, 공부 잘하는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옷들을 입은 채 하나님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죄인인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제아무리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박학다식(博學多識)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는 '너는 나를 모른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바리새인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도저히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 행위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결국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옷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옷에 가려진 자신들의 실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했고, 반면에 세상의 옷을 입지 못하고 있던 세리들, 창녀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조건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위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자신스스로에게 갇혀져 갈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자신은 부족함이 없고 의로운 자로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다같은 죄인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라도 너보다는 선한 죄인이다는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줄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 말은 자신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면 몇 년을 살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았든 그 삶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적당한 도덕과 적당한 양심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살았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점잖은 채 한다고 해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옷을 벗고 모이는 곳입니다. 자신을 가리는 옷을 입은 채 모였을 때 우리에게서는 계속해서 편견과 경쟁과 오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편견과 경쟁과 오만이란 인간이 입고 있는 세상의 조건들, 자신을 가리고 치장하기 위해서 걸치는 옷을 서로 비교하고 자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헛됨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끝까지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결국 헛됨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헛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치 없고 헛된 존재인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시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헛됨을 아는 사람이요, 불신앙인은 자신의 헛됨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세상의 옷을 입어서 자기를 가구고 위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는 세상의 모든 옷을 벗고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워서 보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옷을 벗고서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시면서 나오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죽은 자로서 나오셔야 합니다. 목사로서가 아니라 죄인된 자로서 나오셔야 합니다. 장로로서가 아니라 죄인된 자로서, 죽은 자로서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럴 때 생명 되신 주님께만 나 자신을 맡기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피난처이고 산성이 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기도일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종교라는 또 하나의 옷을 입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라는 종교를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용납할 수 없으셨던 이유도 종교를 통해서 자신을 위장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도덕이란 옷을 입기 위해서도 아니고, 양심이라는 방패를 가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격이라는 담을 세워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런 가식의 옷을 다 벗어버리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모든 편견과 오만과 경쟁이 사라진 채 한분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교 생활이 아니라 진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말씀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했던 고라 일당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고라 일당의 반역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중보자에 의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세상적인 옷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나 나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키고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못한 부분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자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에 각 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을, 그리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신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시는 증거궤 앞에 그 지팡이들을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지팡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8절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고 합니다. 아론의 이름을 쓴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나머지 지팡이는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마른나무 막대인 지팡이가 하루사이에 움이 돋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루 사이에 지팡이에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에 도저히 의심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생명과 죽음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즉 아론의 지팡이만 생명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그것이 너희들의 정직한 실체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두려고 하느냐?'는 것을 지팡이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상태에 있는 불쌍한 인간을 생명이 있는 나라로 보내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참된 생명을 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생명이 아니라 헛된 것에 불과한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목사가 있게 하시고 여러분을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것도 죽은 지팡이에 불과한 여러분들에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 세상에서 그럴듯한 옷을 하나라도 더 걸쳐서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가리면서 남이 자기를 알아주는데 관심을 두고 사시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잘하거나, 높아지거나, 나보다 더 인정을 받을 때 그것을 참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라 일당과 같이 '네게 뭔데'라는 불평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싹이 나지 아니한 죽은 지팡이는 바로 우리들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죽은 지팡이는 얼마를 지나도 죽은 지팡이입니다. 죽은 지팡이에 꽃을 달고, 열매를 달아 놓는다고 해서 생명이 있는 지팡이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옛말에 '개꼬리 3년 지나도 황모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지팡이는 교회를 몇 년을 나온들 죽은 지팡이 그대로입니다. 죽은 지팡이에 무엇으로 치장을 한들 역시 죽은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죽은 지팡이가 자신에게 꽃을 달고 열매를 달고서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살아있는 지팡이다'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진다면 과연 그 지팡이가 옳은 것입니까? 이 지팡이는 자신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진짜 생명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생명을 좇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참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아니면 죽은 지팡이에 불과한 여러분 자신을 치장하기에 급급하십니까? 인간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죽음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비참함과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죽음의 비참함과 고통을 세상의 것으로 가린채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요하다 부족하다고 하면서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세상에서의 경쟁은 죽은 지팡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지팡이는 한낱 죽은 지팡이에 불과한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싸운다니 우습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헛된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은 지팡이가 아름다워봐야 그것 역시 꽃을 달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꽃은 조금 지나면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지팡이 자체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시들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만족하며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면 그것 역시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자신의 본질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비록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론이 살아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죽은 자입니다. 아론도 아담의 후손으로 죽어야 할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아론의 지팡이만 살았습니까? 5절을 보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아론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살기 위해서는 아론에게 나와야 합니다. 아론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론이라는 인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론도 같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론이란 인간을 따라간다고 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셔서 아론을 통해서 생명의 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아론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지 아론이란 인간 자체를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손길을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반역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생명의 손을 내밀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도 네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저를 이 교회에 세우셔서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생명의 손을 내밀고 계실 뿐입니다. 저를 따르지 마시고 저를 통해서 제시되는 생명을 붙드십시오. 여러분이 저를 따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저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저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선한 목사도 되지 못합니다. 삯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를 통해서 전파되는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깨닫고 그 생명의 손길을 잡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살길이요 이 시간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여러분은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셔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손길은 무엇입니까? 아론은 제사장입니다. 즉 제사장의 정신 안에 생명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저주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이 은혜로 생명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까? 완전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영생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나를 가리워주고 치장시켜주는 세상의 옷이 관심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은혜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 외에는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신자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기보다는 설교를 듣고 스스로 신자가 되보려고 합니다. 스스로 선한 사람되어서 하나님이 천국 보내지 않고는 못배길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인간이 되보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우린 죽은 지팡이여서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영생에 자신의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괜히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잘났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편함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제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무엇을 해도 죽은 지팡이라는 입장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했다는 것을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게 될 것이고, 경쟁하거나 비교하지도 않을 것이고, 나는 하는데 남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지팡이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알고 생명의 손길을 붙잡는 참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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