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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와 양 (민 2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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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이 한계점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실체만 분명히 깨닫고 자신을 바라본다면 아마도 지금의 교회는 전혀 다른 모습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계시라는 특이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도 생각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멸망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면 알 수 없습니다. 즉 세상에서는 배울 수도 없고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계시라는 방법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지식과 생각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 계시입니다. 만약 인간의 생각과 상식에서 나오는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하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계시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경험과 상식과 지식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이 계시 역할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종교에 불과한 기독교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상식과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 앞에 서서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에 순종하고자 하는 신자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상식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경험, 상식을 앞세우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여러분의 상식과 경험을 앞세워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식과 경험을 앞세우는 그 순간 하나님의 계시가 무시되고 짓밟힌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능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올해도 어김없이 교회의 연례행사로 등장하는 것이 수험생을 위한 특별기도회입니다. 내 자식이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이고 경험입니다. 이런 상식과 경험을 앞세운 인간들이 찾는 하나님은 내자식을 대학에 합격시켜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수호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인간의 열망에 함께 동조하고 부응해서 계시를 짓밟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열망과 인간의 욕심을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시는 오히려 인간의 열망과 욕심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 증거는 자신의 모든 열망과 욕심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보이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도 각기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방언이라는 것을 하는 신자는 방언하게 하는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신자는 병고치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따로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한 예수님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을 과감하게 버리고 지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던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소원과 고집만 앞세울 뿐입니다. 자기 열망과 욕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서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은 괴로운 소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을 때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부자 청년에게는 영생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게 그 말은 결코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괴로운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청년은 '괜히 찾아왔다'는 후회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이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고집과 자기 욕심과 자기 열망과 자기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괴로운 소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머리를 움켜쥐고 '그것은 복음이 아니야'라고 거부하고 싶고 그 복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만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것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괴로워하면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교회는 그 복음을 바로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자가 교회로 찾아오면 우리 교회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군이라고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로 가지 않고 자기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안달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돕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교회도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오직 영생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복음을 듣기 싫어해서 다 도망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데도 그 복음에 대하여 괴로워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모든 소원들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복음인데도 그것이 좋아서 모여드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기적 안에 있는 분들입니다. 백번 들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귀를 막고 듣기 싫은 소리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복음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고자 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 안에 있는 분들을 가리켜서 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바로 그 기적 안에 있는 분들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목자와 양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양없는 목자는 의미가 없으며 목자 없는 양이란 그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목자의 인도가 없고 목자의 지켜줌이 없는 양은 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양은 목자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자는 목자다워야 하고 양은 양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양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며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 또한 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자에게 있어서 참된 양이냐 아니냐의 구별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느냐 알아듣지 못하느냐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릅니다. 반면에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합니다(요 10:4,5). 따라서 교회는 목자다운 목자와 양다운 양이 서로 모여서 하나님의 구원받는 참된 무리로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의 성품은 목자 아닌 가짜 목자의 음성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흔히 목사들이 교인들을 향해서 염소가 되지 말고 양같은 신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염소는 잘 들이받는 성질이 있는데 목사에게 반대하고 공격하는 것은 곧 염소 같은 신자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양은 온순하고 순종을 잘하는데 목사에게 순종을 잘하는 것이 곧 양같은 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가르신다는 말씀을 덧붙여서 목사를 공격할 때의 불이익에 대해서 엄포를 놓습니다. 즉 목사를 목자의 위치에 놓고 교인을 양의 위치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목자가 아닙니다. 물론 목사가 목자의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목자는 아닙니다. 참된 목자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목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목자는 하나님이 심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습니까? 목사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목사라 해서 양과 다른 위치에 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외적인 조건으로 차별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목자가 목자다운 모습에서 벗어났을 때 목자의 자격에서 제외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전에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자의 자격에서 제외된 것입니까? 그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모세가 목자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가데스에서 발생했던 므리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간단하게 가데스 므리바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거할 때에 마실 물이 없음으로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하나님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위해서 물은 나오게 하셨지만 이 일로 인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단지 양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것이 목자가 아닙니다. 참된 목자는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만나로서 물로서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먹을 것을 요구했을 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지 그들을 배불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배를 위해서라면 애굽에서 먹었던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만나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물이 나올 수 없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는 것도 잠시후면 다시 목마를 물이 너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가 너희를 살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 앞서있는 결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이미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온 한번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반석을 명해라는 말씀을 뒤로하고 단지 이스라엘이 물 때문에 또 다시 자기를 원망하는데 대한 분노와 경험이 앞세워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석의 물을 통해서 '너희를 살리는 것은 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로 하여금 목자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결코 물도 아니고 양식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귀한 것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목자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양들에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목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양들은 단지 목숨을 유지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살고 양식의 풍족을 누리는 쪽으로만 끌고간다면 그것은 절대로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요 거짓 선지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도 목자도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제공하면서 교회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은 교회도 아니요 목자도 아닙니다. 사람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고 있는 인간의 집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된 양은 바로 그것들이 가짜임을 압니다.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거룩이란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세상에서 구별되어 있는 것,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목자란 인간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면 안되고 오로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보여줘서 양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양들이 원망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목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어야 할 모세가 자기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는 분노하는 인간의 상식과 경험이 앞선 나머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가려진 것입니다.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희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란 희생하는 자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목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목자는 예수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대신 한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모세 대신 그 자리에 여호수아를 세우게 되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에 감동된 자라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능력과 재주를 많이 발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합니다. 때문에 성령에 감동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목자는 양들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고 구원으로 인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목자의 자리에서 목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이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참된 양은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을 따라서 세상의 것은 썩어질 것으로 여기고 오직 영원한 생명 되는 것을 바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양들에게 전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전하고 인간의 상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예수를 전하고 세상의 복을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목자 되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제 목자의 자리에서 목자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야 할 사람은 목사이며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목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만 교회 밖에서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세상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즉 여러분이 목자로 살아가야 하고 선지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믿지 않고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보여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가 목자의 모습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 목자를 제외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는 양이며 세상에 나가서는 목자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목사가 여러분의 목자가 아닙니다. 주님만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목자가 잘못된 모습을 보여도 거기에 영향받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를 바라볼 때 필연코 목사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예수님처럼 완벽한 모습을 보일 수만 있다면 목사를 바라봐도 되지만 목사도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를 바라보고 있다면 목사에게서 세속적인 모습이 보여질 때 '아, 저래도 되는구나'라는 오해를 가지게 되고 결국 자신도 스스럼없이 세속적인 모습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잘못된다고 같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비록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하나 그도 결국 인간입니다. 온전히 성령에 충만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 양식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세상 것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참된 양으로서 참된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서 여러분이 성령에 감동된 자로서 목자의 모습을 보이며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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