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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일조 (민 18: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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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에 대한 청년의 반응은 근심이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 왔고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뻐하고 돌아가야지 무엇 때문에 근심을 합니까? 돈 때문이었습니다. 청년은 돈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을 버리라고 합니다. 즉 주인을 돈에서 주님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결국 청년은 자신의 주인인 돈을 버리라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청년은 차라리 하나님을 무시하면 했지 돈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청년은 영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영생이 돈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영생을 포기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돈을 포기한다는 것은 더욱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청년은 돈을 포기하지 않은 영생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듣고 난 후의 여러분의 마음은 기쁨입니까 아니면 근심입니까. 영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보다는 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이 더 컸던 청년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청년과 같이 돈이라고 하는 기존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만 안겨주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가지고 있는 영생에 대한 개념은 돈을 여전히 주인으로 섬기면서도 행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생이었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만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세상에 전혀 매여 있지 않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은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도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주님의 피를 업신여기는 사람에게서 무슨 선한 행위가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들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청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돈도 포기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이 단지 영생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청년처럼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목사에게 그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며 사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청년은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뭔가 행하고, 충성을 다하고, 바치고, 자기의 성의를 다 보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청년의 착각이었습니다. 자기 것이 있다는 착각입니다. '내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로 출발하는 것이 신앙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의 정성과 성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청년의 생각이었고 오늘날 기존 교인들의 뿌리 깊은 생각들입니다.

신앙은 '내 것은 없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것이 있는 한 신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소유에 대한 울타리를 더욱 단단히 하는 가운데 그나마 영생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뭐 할까요? 무엇을 하면 복을 주고 천국도 보내주시겠습니까?'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십일조이지 않습니까? 물론 십일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십일조를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을 더욱 돈의 노예로 만들어 가고 종교사업을 위한 기부금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 바로 신자라고 자처하는 교인들입니다. 십일조가 삶의 안전과 보호와 풍요를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고, 미래의 천국까지 미리 예약해 놓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 종교계의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의 의미를 이해함으로 십일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와 교인들은 십일조를 가운데 두고 한쪽은 더 바치게 하고 한쪽은 덜 바쳐보려고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말라기 3:8절을 인용하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다 그래 가지고 잘사나 보자'라고 엄포를 놓고, 교인은 교인대로 '교회가 너무 돈만 밝힌다 목사가 헌금만 강요한다 교회가 썩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돈의 노예로 세상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오늘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께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 이 말씀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오늘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헌금을 하라는 얘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을 강조하는 현 교회에 반발한 의협심 때문도 아니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저 개인의 의로움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 여전히 돈이 주인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 설교를 들으시면 결국 여러분은 자신의 소유를 좀더 아끼고 교회를 향한 쓸데없는 지출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일조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할 이유는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고 십일조를 내지 않고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과연 우리가 영생이 포기되는 고통보다는 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왔던 죄인이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눈을 뜨면서 오직 주님만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만 매달려 살아가고자 하는 신자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그 기원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십의 일을 바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일부터 설명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상당히 복잡해지기 때문에 오늘 본문 안에서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하십니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신 이유는 21,22절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서 레위 자손이 하는 회막의 일을 갚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에 십일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의 중요성은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는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바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일조의 의미를 돈에 두고 있기 때문에 돈이 아까운 마음에서 헌금에 대한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를 해야 하느냐 나같이 가난한 사람도 헌금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마음을 보시지 돈을 보시겠느냐'는 등등의 핑계를 찾아내면서 헌금에 대한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것은 돈에 관심을 두고 사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가 누구에게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십일조를 내야할 당위성을 말하기 위해서 구제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20절에 보면 레위인은 땅의 기업도 없고 분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쉽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신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결론지으면 곤란합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구제가 아닙니다. 물론 신 26:12절을 보면 십일조가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들의 몫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단순히 없는 자들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희생만큼은 대대로 잊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어린양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희생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련하신 장치가 세상에 기업이 없는 자들을 있게 하시고 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해서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기업도 없이 고아와 과부와 같은 비참한 모습이었던 자신들이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계속해서 찾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계속해서 복안에 머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십일조라는 것은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그 행동이 가상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안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그 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깨닫고 복의 출처를 인정하는 행위로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복의 출처는 희생입니다. 이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가 레위인을 향하는 것도 십일조가 결국 희생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들이 평소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해주는 대가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죄뿐만이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한 대가도 아닌 것입니다. 한쪽은 희생하는 자, 또 한쪽은 그 희생 덕분에 살아있는 자의 사이에 십일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복은 희생을 보여주는 제사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율법을 통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을 통해서 복이 주어집니다. 십일조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은 대제사장 되셔서 희생의 의를 완벽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가 십일조를 복의 통로로 고집 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불필요성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쳐야 할 십일조는 세상 물질이었습니다. 세상 물질에는 인간의 죄가 담겨 있습니다. 돈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돈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돈 때문에 말씀을 경시하면서 오로지 돈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물질에는 인간의 죄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레위인에게 바치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의 산물인 물질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은 그것을 받음으로 회막의 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레위인이 담당해줍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내면서 단지 도와준다거나 돈을 낸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의 산물을 바치면서 죄없는 상태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레위인이 죄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의 자리에 있는 것 같이 누군가 우리의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리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있는 상태를 좋아하십니까 죄없는 상태를 좋아하십니까. 악한 세상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좋아하십니까. 물론 이구동성으로 죄없는 상태를 좋아하고 천국을 좋아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염려스러운 것은 그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부자 청년의 차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상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새로운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죄없는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은 돈이 노예로부터 벗어나기를 소원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돈에 우리의 모든 죄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심, 다툼, 미움, 시기, 사기, 욕심, 거짓말, 살인, 간음, 이런 모든 것이 다 돈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죄없는 상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돈을 포기하는 것을 영생의 문제보다 더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천국까지 확보하려는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땅의 죄있는 것이 죄없는 상태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레위인의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비록 죄악가운데서 살아가지만 나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복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복이 어디로부터 주어지는가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 내가 죄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십일조를 이상하게 가르친 것 때문에 교인들은 집안에 조그만 우환만 생겨도 십일조를 생각하곤 합니다. 또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는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죄없는 상태를 사모하고 희생 속에서 죄용서의 긍휼과 사랑을 잊지 말고 살아라고 주신 법을 인간들이 자신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종교집단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하는 법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관심을 죄용서에 두고 살아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 나머지 십분의 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덕분에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십일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에서는 어떤 식으로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우선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구약과 같이 물질에 대한 십일조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십일조가 물질이었지만 지금은 우리의 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돈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매여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나는 그 앞에서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오늘날의 십일조의 뜻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십일조라는 돈을 낸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할 일 다한 신자로서 떳떳함을 가지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십일조라는 돈으로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체를 다 드려도 갚기에 부족한 것이 주님의 은혜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겨우 돈 얼마로서 덮으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하찮은 싸구려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주인은 돈이 아니고 주님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나오는 것이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용서에 모든 것을 걸고 주님께 온전한 헌신을 하며 살아가는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돈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말에도 근심이 되지 않습니다. 네 욕심으로 살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라는 말씀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마음으로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기업으로 분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업은 하늘나라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기업도 분깃도 없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내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레위인의 기업과 분깃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있는 세상을 부러워 하지 말고 죄없는 거룩한 나라를 마음에 두고 종신토록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 가운데 십일조를 하나님께 거제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인도 죄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말해줍니다. 죄용서는 완벽한 제사장의 자리에서 희생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정신에 근거할 때 헌금이란 '나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돈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를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때문에 참된 헌금은 주님만이 복의 전부인 것을 아는 자가 드릴 수 있습니다. 돈을 섬기고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리 헌금을 한들 그것이 어떻게 선한 행동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헌금은 교회가 강요하고나 어떤 압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발적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서 가져나온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액수를 정해서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은혜 안에서 언제나 자발적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서 내는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헌금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인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은 돈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교회는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이 유지하는 것이지 돈이 유지하는 것이 아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교회라는 조직에 미쳐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헌금을 하셨습니까? 왜 하셨습니까? 교회에 빈손으로 오기가 미안해서 바친 것입니까? 헌금은 교회에 들어오는 입장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십일조의 정신을 잘 이해하시고 죄악된 세상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돈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런 마음 되어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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