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정한 인간 (민 19:20-22)

첨부 1


22절에 보면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부정한 자에게서는 부정한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자는 무엇을 해도 부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사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부정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정한 짓을 해야 부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정한 짓을 한적이 없고 오히려 착한 일만 하고 있는데 어떻게 부정한 인간이냐고 반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하면 도저히 그 말을 인정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지금까지 나쁜 짓을 한적이 없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행동에 둡니다. 즉 착한 일을 하면 그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자신이 남들같이 착한 일을 못해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는 못해도 최소한 남에게 해를 입히는 나쁜 일은 한적이 없으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착한 일 나쁜 일에 관계없이 인간은 더러운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살아있는 성자로 전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테레사 수녀도 부정한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제가 전에 사람에게는 선에 대한 욕심도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남을 돕고 싶은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욕심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직 가난한 자들이 저렇게 많습니다. 제가 좀 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왜 나를 병들게 하십니까? 제가 그들을 좀 더 도와줄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이 기도가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틀리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사람처럼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서 건강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이 왜 나쁘냐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병이 든 것에 대해서 용납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착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면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도록 나를 도우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그동안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도왔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그들을 책임지셨던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싶은 선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병을 주신 일에 대해서 용납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입니다.

우린 이것을 바울의 예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간질인지 안질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병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지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에 가시, 또는 사단의 사자라고 말합니다(고후 12:7). 바울은 이것이 자신에게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세 번 주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 상반절)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면 복음을 좀더 잘 전파하기 위해서 가시와 같은 것을 없애달라는 것은 참으로 신자다운 기도이며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능력의 약함과 강함에 상관없이,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몰랐을 때 바울은 가시가 자기에게서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가시가 떠나가야 좀 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의 응답을 통해서 인간의 약함이 곧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전혀 그 어떤 인간에게도 기대를 걸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단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뿐입니다. 만약 신자가 세상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그는 결국 교회 안에서도 행동을 가지고 믿음 있는 신자, 믿음 없는 신자로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설교하고 나거나 또는 청년들에게 강의를 한 후에 흔히 하는 질문은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까?'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것은 지금껏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신자되고 착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해도 그것은 더러운 것이고 우리를 신자되게 하지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반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무엇을 해도 죄라면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죄가 없는 것입니까?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무것도 안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사람은 하다못해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고 몸부림을 칩니다. 즉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행동을 안한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는 끊임없이 미움과 분냄과 살인과 간음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 15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손을 씻지 않은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들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7-20절)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행동이 인간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착한 행동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속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 나오는 인간은 다 더럽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러운 인간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하나 안하나 죄인, 부정한 자라는 굴레는 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만 나쁜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착한 행동을 해서 착한 사람이 되자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윤리와 도덕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세상을 좀더 좋은 환경으로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착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 착하게 살자고 강조하는 것이나 또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나쁜 행동은 안하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을 멀리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나쁜 짓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 지금의 자신의 위치와 사회적인 명성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죄를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벌 안받고 자신의 체면과 지위에 손상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인지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 죄를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서 선을 추구한 것입니다.

인간은 부정하다는 선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착한 사람이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며 사는 인간인데 무엇을 한들 자기 이익을 벗어난 행동이겠습니까?

인간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모든 행동이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해로운 것은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이 실패로 보는 것은 해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성장, 발전, 출세, 성공, 이런 것들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실패로 말합니다. 망하는 것이 실패고 죽는 것이 실패입니다. 때문에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실패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패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는데 그래도 실패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사도나 선지자들의 죽음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야 '왜 죽나?'라고 하겠지만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한 죽음'으로 여기며 결코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실패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이 실패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나기 때문에 실패가 아닌 성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내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이기 때문에 가볍게 아무런 부담없이 '실패가 아닌 성공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면 결국 나 자신의 죽음도 실패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망하고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망하지만 그 망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몰랐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늘을 향한 눈이 떠졌다면 그 망함을 과연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실패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성장과 발전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이 여전히 이런 기준과 시각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여러분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 분은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성공이라 하고 망하고 죽는 것은 실패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두려워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역시 그것을 실패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세상의 시각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실패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나오는 것이 실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나오든 안나오든 상관없이 하나님 입장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실패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인간은 왜 부정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현재 착한 행동 여부에 상관없이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날 때부터 부정한 자로 태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내세우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부정한 인간에 대해서 모릅니다. 하나님은 예수쟁이가 말하는 신이고, 자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나쁜 짓 안하고 적당하게 착하게 살면 착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극구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한 일도 없는데 죄인이라고 하는 말부터가 기분 나쁜 것이고, 씻을 죄도 없는데 죄를 씻어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안 맞는 말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께 나오십니까? 인간의 부정함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오십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하고 나오십니까? 인간의 행위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고 나오십니까? 인간은 무엇을 해도 악한 것이고 죄인의 모습 그대로라는 말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전혀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실 일에 대해서만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신 일만이 우리를 살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고 합니다.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한다는 것은 부정한 인간이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결케 하는 물로 씻김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성소를 더럽힌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부정합니다. 어느 한부분만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고장난 부속품만 갈아 끼우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정함은 어느 한 부분을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선한 부분이 있고 악한 부분이 있어서 악한 부분만 제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자신의 의로 여기며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행동은 피하고 선한 행동은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무시하며 성소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정한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입니까? 우선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삶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직장 다니고 공부하고 사업을 했다면 그것을 팽개치고 뭔가 좀더 신앙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직장을 팽개치고 신학교를 간다든지, 선교사로서 먼 오지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신앙적인 행동과 신앙적이지 않는 행동을 구분하는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부정한 존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악한 것은 우리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행동은 모두 내 입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 몸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가꾸고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모든 행동을 이것을 중심으로 행해집니다. 사업을 해도 나 자신을 위해서하고, 공부를 해도 나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하고, 돈을 벌어도 나를 위해서 벌고, 자식을 키워도 나를 위해서 키웁니다. 이것이 부정한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자기 입장에서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이 입장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전에는 무엇을 해도 내 입장에서 나를 위해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머리 속에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질 때 자신의 편함과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핑계거리로 내세웁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본능인데 이것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단의 소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벗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본능에 안주하고자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본능과 싸워서 이기라거나 본능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부정한 인간의 본능이 어떤 것인가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매여 살아가지 않으려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매사를 내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