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반석 (민 20:1-13)

첨부 1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 된지가 112년이 되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기독교가 종교놀이화 되어 간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종교놀이라고 말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놀이의 특성이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이라는 것은, 필연코 재미를 동반합니다. 재미가 없는 놀이는 이미 놀이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나는 지금 재미를 위해서 논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향해서 '여러분은 종교놀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때 분명 여러분은 반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분명히 놀기 위해서 교회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교회에 온 것인데 무엇 때문에 종교놀이라고 하느냐는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이라는 특성을 이해하시면 제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한 대로 놀이는 재미가 동반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이라는 것을 어떤 틀과 형태를 가진 오락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집에서 TV보는 것은 놀이가 아니지만 고스톱 치는 것은 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틀과 형태 속에서 즐기는 것만이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의 본질은 재미입니다. 즉 재미를 찾아서 움직이는 그 자체가 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고 한 사람은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두 사람중 누가 놀이를 하고 있습니까? 말한 대로 우린 놀이라는 것을 어떤 틀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오락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컴퓨터 게임을 놀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놀이입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놀이이고,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재미있다면 가만히 누워 있는 것 역시 놀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컴퓨터 게임 하는 것을 놀이라고 하지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은 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누워 있으면서 나는 놀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재미있게 노는구나'라고 말하면 그것을 이해하지만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에게 '재미있게 노는구나'라고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비록 교회에 오실 때 놀기 위해서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재미를 찾으신다면 그것은 결국 놀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게 재미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교회에 오면서 비록 '나는 놀러간다'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재미를 주는 교회를 기대하고 재미가 없을 때 교회에 애 대해서 식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모든 것이 바로 종교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놀이라는 것은 굳이 영화보고, 여행을 가고, 골프를 치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고스톱을 치는 것만이 놀이가 아닙니다. 재미를 추구하는 모든 것이 놀이입니다. 놀이란 자신에게 재미가 되는 행동 그 자체가 놀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놀이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유년부나 학생부 청년부 모든 교육들이 놀이화되어 갑니다. 재미없는 것에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멀리하기 때문에 우선 재미를 제공하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아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 교회가 재미를 벗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까?

많은 신자들은 보면 재미를 앞세웁니다. 심방도 재미로 다니고, 구역예배도 재미있기 때문에 참석하고 재미없으면 참석하지 않고, 교회도 재미있으면 부지런히 나오고 재미없으면 오전예배만 겨우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해 버리고, 성경공부를 해도 재미로 하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바로 현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단지 종교놀이로 여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전혀 재미를 느끼지 말고 재미를 줄만한 것은 모두 거부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재미를 기준으로 하지 말고 재미를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재미를 제공해 주느냐 못해주느냐로 교회를 판단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재미를 찾으신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고 종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놀이가 교묘하게 종교라는 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접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찬양집회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요란한 악기를 동원해서 복음성가를 불러대며 율동을 하고 열광적으로,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반면에 학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쫓아다니면서 열광하고 그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까지 흘려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른들은 축구를 보며 열광하기도 하고, 야구 농구를 보면서 열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찬양집회에서의 열광은 은혜스럽고 거룩한 것이고 나머지는 단지 오락입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재미를 중심으로 한 놀이이고, 자신에게 재미를 제공해주는 것에 열광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이고, 다만 종교인은 종교의 틀을 통해서 그 재미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찬양집회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재미를 모두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집회를 안한다고 해서 사람이 재미를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를 배격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는 신자가 교회에 나올 때 재미를 기준으로 해서 나와서는 안되고, 교회도 신자들을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재미를 기준으로 재미를 제공하기 위해서 힘써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얼마든지 즐거워하십시오. 다만 재미를 기준으로 하지는 마십시오. 재미를 찾지를 마십시오. 여러분이 찾을 것은 다만 하나님입니다. 이런 정신이 아닐 때 여러분의 신앙은 단지 종교 놀이로 그쳐버릴 것이고, 기독교는 배부른 자의 여가 선용을 위한 도구로 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재미를 찾는 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삶에 여유가 없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재미를 찾지 않습니다. 삶에 절박한데 재미를 찾을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노는 것도 삶에 여유 있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외식을 하고, 여행을 하고, 볼링을 하고, 수영을 하고, 친구를 찾아다니며 노는 것도 모두 사람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염려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교회를 여유 있는 생활 속에서 누리는 하나의 취미생활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분 스스로는 취미생활로 교회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놀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 나온 것도 분명히 아닌데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놀려고 해서 노는 것이 아니라 결국 놀이가 되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신앙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이 여러분의 신앙을 무시하고 있는 말로 들려진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분명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하신다면, 적어도 여러분의 의식 속에 천국이라는 것이 살아있다면 제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놀이에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얘기는 그동안 수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망은 이스라엘의 주특기였습니다. 그러나 원망이 이스라엘의 주특기였다면 결국 오늘날 우리들의 주특기도 원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망이 일어난 장소는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시험의 기간입니다. 신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간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신 것은 가나안 정탐때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서 징벌하시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으로 달라져 가기 위한 가르침을 받고 시험을 받는 장소였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이스라엘에게는 시험이요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알기 위함이었고, 사람은 세상의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나가 제공되는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광야는 무엇입니까? 광야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후의 인생 전체를 말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 자체가 이스라엘과 똑같이 우리를 낮추시며 우리를 시험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고자 하시는 기간이고, 우리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시는 기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보다 먼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경우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했을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시험을 친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가고 편안하게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삽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지금 나를 평가하고 계시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가?'는 의식을 항상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런 의식들이 사라지고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천국갈 자신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천국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져 있기 때문에 교회가 한낱 여가선용의 장소요 자기 재미를 위한 수단이요 배부른 자의 종교로서 종교 놀이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반발하실 것 같아서 한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단지 물이 없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먹을 것 타령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만나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원망한 것입니다. 목이 마르자 물도 없고 더군다나 먹을 것도 전혀 없는 환경에 대해서 그들은 불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직장 잃어버리고, 더군다나 건강까지 잃어버려서 돈을 벌 수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자식까지 병이 들고, 병원 다닌다고 집까지 다 날려버린 그런 상황이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여러분은 원망을 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의 우리들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달라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은 사람이 달라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바라보는 그런 인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인간으로 달라져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말씀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은 충분히 달라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8절에 보면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로 반석에게 명해서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 입니까?

출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과 동일하게 물이 없어서 원망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식으로 물을 주었습니까? 6절에 보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마신 경험이 있습니다. 반석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물이 나올 수 없는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하나님을 이미 그들은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지팡이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모세의 지팡이를 보면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파종할 땅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지팡이를 봄으로서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항상 현실에 매여서 불만과 원망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이지만 현실을 초월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로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출 17장의 모습이나 민 20자의 모습이나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똑같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한 것은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이제 후로는 은혜로 사는 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살아가는 삶으로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들이 그렇게 달려졌는지를 시험하시고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다시 인도하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의식을 행했고 또 그들 스스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짐이 없이 옛사람 그대로 였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달라졌습니까?' 믿음의 세월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근거는 못됩니다. 하나님은 달라진 인간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달라진 인간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끄집어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물이 없는 곳으로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파종할 땅도 없는 것으로, 그야말로 희망도 없고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극한 현실로 몰아 넣는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과연 달라진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는지를 보시고자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분이 평소에 고백했던 믿음을 드러내십시오.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드러내십시오. '나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는 귀한 기회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달라진 인간이란 자신이 깨어진 인간을 말합니다. 자신이 깨어진 인간은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자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보면서 같이 죽었기 때문에 그런 신자는 원망과 불만이 아니라 오로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 놀이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생명으로서의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를 아십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아신다면 여러분 스스로 자신이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인지 확인하십시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원망과 불평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달라졌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모세와 아론까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이 천국가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천국갈 수 없는 한 예를 모세와 아론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행위를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행위'로 규정하십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명령만 하면 물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친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고 반석을 친 것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생각, 자신의 혈기를 앞세운 결과입니다. 즉 인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고전 10:4에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즉 출애굽해서 이스라엘이 물이 없다고 원망을 했을 때 그로 인해서 반석이 매맞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반석이 매를 맞음으로 이스라엘은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단지 물을 마셨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원망 때문에 반석이 깨어짐을 당한 것을 바라보고 자신들도 함께 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자기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사는 자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반석을 쳤던 자신의 경험을 앞세우고, 자신의 생각, 혈기를 앞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믿지 못한 것이고 여호와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용서 받는 용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너희도 같이 죽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죽은 자로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달라진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까? 어떤 현실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로 달라졌습니까? 이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극한 상황으로 이끄실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은 주님과 함께 죽고 말씀에만 순종하며 사는 신자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신다면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교회를 찾는 것은 여가선용 정도로 여기고, 놀이하는 식으로 내 재미를 위해서 찾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 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