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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물의 노래 (민 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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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의 노래 (민 21:10-20 )

신자가 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읽어야 믿음 좋은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가려져 있는 분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세상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란 글자 석자를 아는 차원이 아니고 사도신경을 외우고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10번, 아니 100번을 읽었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증표가 되어버리면 구원의 근거가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가려져 있는 분입니다. 가려져 있는 분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조금씩 부서져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애당초 하나님과 전혀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본성을 부수지 않고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의 내가 죽지 않고서는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두 우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죽이신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 자체를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고전 3:16절이나 고후 6:16절에 보면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인데 이 성전의 의미는 야곱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에서와 이삭을 속인 일로 인해서 집을 떠나게 된 후 한 곳에 머물렀을 때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고 그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때만 해도 야곱은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를 살려주는 분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자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란 약탈자란 뜻입니다. 그 약탈자의 모습이 깨어진 자로 다시 벧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창 3:15절에 다시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때의 벧엘은 의미가 다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야곱과 말씀하셨던 그 장소에 거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는 놀랍게도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란 인간자체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곧 벧엘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야곱은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못된 인간성이 깨어지고 은혜로 풍성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곧 성전이라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도 나를 앞세우는 우리의 본성을 죽이시고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케 해서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처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겠다고 하신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마지막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시고 다 멸하신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각각 다른 성전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죽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케 된 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을 두고 모이는 무리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상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관심 두고 있는 교회는 성전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전된 교회의 교인 같으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는 마음두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언제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싸움입니다. 어느 쪽에 뜻을 두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는 것은 보이는 것에 미련 두고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는 새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놋뱀, 즉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깨어진 참된 이스라엘, 즉 참된 교회의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물을 두고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이 우물의 노래가 어떻게 참된 신자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감사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거의 일회성의 감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한번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한 것은 감사의 목록에서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흘리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감사의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은 이미 이전의 은혜에 대해서는 잊었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것은 작아 보이고 새로운 것이 더 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 보이는 새로운 것이 주어지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은 이전에 있었던 감사와 기쁨은 사라진 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고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고요하고 평안한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바다에서 파도가 치듯 흔들리는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아무런 일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사셨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그런 삶이었는지 아니면 파도가 없으면 고요하다가도 파도만 치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파도가 치면 그 파도에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는 없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시간에 도대체 왜 파도가 칠 때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깨닫고 파도에 상관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살아가는 그런 신자되는 것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 파도가 칠 때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줄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도 힘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풍랑 속에서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풍랑에 상관없이 너희들 마음은 평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우리의 힘으로 여긴다면 우린 풍랑에 상관없이 평안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 이유는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스스로 책임져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불어닥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듯대로 하시겠지라는 믿음이 우리를 고요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의 고요함, 이것이 곧 안식이며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모든 것, 그리고 내일의 모든 것도 선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그 겸손함이 있는 신자가 곧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교인인 것입니다.

지금 광야를 떠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떠도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많은 양식이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겨우 하루 분의 양식만 주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거지입니다. 내일의 것이 없고 오늘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 6: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일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은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것을 스스로 정해놓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들은 내일의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내일의 것은 오늘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를 기대하는 습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습성으로 살지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교회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의미를 언제나 미래에 둡니다. 미래가 좋아야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라는 것이 과연 여러분에게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미래는 영원한 미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내일이 미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일이 오면 내일은 오늘이 되고 다시 또 내일이 있게 됩니다. 결국 세상에서의 미래는 죽음으로 끝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좋은 미래를 통해서 행복과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평생토록 죽을 때까지 행복도 기쁨도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성도라면 내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좋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언제나 오늘에 충실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살뿐입니다. 오늘은 현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일도 오늘이요 모레도 오늘입니다. 이렇게 내일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신자야말로 풍랑에서도 고요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절, 18절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라는 이스라엘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그 대상을 보면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물물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물물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에 깊은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을 향한 길은 평탄하고 가기 좋은 길이 아니라 골짜기와 비탈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험난한 길로 인도하신 뒤에 브엘로 인도하셔서 우물에서 물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우물에 감격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우물의 물은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전에도 이 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물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에는 놀라운 은혜로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하찮게 보이고 작은 것으로 보여서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골짜기와 비탈길로 이어졌던 힘든 광야생활, 즉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힘든 인생살이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팔팔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살 때는 은혜도 아니고 하찮게만 보여진 것이 어려운 인생살이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점에서 다시 이전의 것을 바라보니까 그것이 놀랍게도 큰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신의 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물물의 은혜를 험한 인생의 여정을 지난 후에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우물물의 은혜를 발견 한 후 그들은 우물물로만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행복이란 환경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환상 때문에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시시하게 봐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로 얼마든지 미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서 행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인간이 험한 인생을 지내고 난 후 노년에 옛날을 회상할 때 '그때가 좋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신다면 그 인생을 통해서 잃어버린 은혜와 감사를 되찾을 귀한 기회인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줄도 모르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렸던 것이 힘든 인생 속에서 참으로 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죽어져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 매이고, 큰 것만 기대하고 살면서 감사도 잊어버리고 은혜도 잊어버리고 조금만 풍랑이 불어도 흔들리고 낙심하고 원망하며 살았던 우리의 옛사람이 깨어지고 부서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작은 것에 감격하고, 작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안다면 그 신자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것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 주위에 가득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작은 것에 담겨 있는 은혜는 여러분의 주위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면 풍랑 속에서 그 마음은 고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의 인생이 너무 험하고 골짜기와 비탈길로 이어지는 인생의 연속이라고 생각되어지신다고 해도 행여 그것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물물을 두고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신자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인생 속에서 잃어버리고 지나쳐 버린 은혜와 감사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이젠 더 이상 환상에 지나지 않는 미래에 매여 살지 마십시오.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없는 오늘을 살게 될 것이고, 그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내일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는 사람은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두려움과 흔들림으로 불안한 세월을 살아가는 인생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우물의 노래가 여러분 삶과 가정에서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우물물을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말씀으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작은 것의 은혜와 감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큰 것을 기대하는 욕심 안에는 불만과 원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여러분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낙심케 했던 것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던 나의 욕심인 것을 아시고 그러한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의 최선의 삶입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삶으로 자라가기 바랍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작은 것을 노래할 줄 아는 신자되어서 은석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우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겸손한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자로서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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