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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의 죽음같이 (민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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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죽음같이(민 23:1-12 )

목사인 제가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분 각자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신자로서 교회로 모였을 때 과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나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 장차 주어질 영광된 세계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찬 채 나오셨는지, 아니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생활하면서 마음을 가득히 매웠던 현실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을 그대로 지닌 채 나오셨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께 설교하는 내용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고 기다리는 삶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매여있는 상태라면 결국 저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마음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공허하고 쓸데없는 말로 그쳐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현실 세계에 대해서는 열려있지만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는 열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인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으로 할 일은 다 끝난 것이지만 여러분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로 더욱 한발 다가가는 유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현실 세계를 향해서 열려있는 여러분의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쓸데없는 공허한 말로 여러분의 귓가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이 시간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하늘의 말, 하늘의 소리가 이 예배당을 울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여러분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또 살려 놓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인데도 불구하고 우린 여기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 자체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려 있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오로지 내 뜻과 내 계획을 위해서 움직이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은석가족 친목회를 가지면서 시 24편을 읽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온 우주 만물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 즉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린 어딜 가도 하나님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땅을 밟으면서 '난 지금 하나님의 땅을 밟고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땅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땅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물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숨을 쉬게 하는 공기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태양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느것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을 계발해서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감사하면서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인간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이 더 좋아집니다. 마음은 점차 하나님에 대해서는 굳게 닫혀져가고 세상을 향해서만 열려져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도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 없고 오히려 허황된 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세상에서야 천국, 영생,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고 한낮 정신나간 종교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그런 말씀들이 환영을 받아야 하고 설렘이 있어야 하고 기다리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하나님이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허황되고 현실성이 없는 말로 치부되는 천국, 영생,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교회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허황된 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믿는다는 말은 합니다. 하지만 믿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 희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을 믿고 영생을 소망하고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교인 되기 위해서이고 현실을 살 때 필요한 것은 역시 돈이고, 건강이고, 직장이고, 능력있는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고 또 은석교회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돈, 건강, 직장이 필요하고 죽어서는 영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는 영생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생이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되고, 돈 버는데 도움이 된다면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영생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때로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게 합니다. 이런 영생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결국 인기 없는 품목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교회를 잡화점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품목을 가져다 놓고 인기 있는 것은 앞에 진열하고 인기 없는 품목은 뒤로 밀려서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버립니다. 이것은 장사꾼이라면 당연한 경영방식입니다. 인기 없는 것은 더 이상 진열해서는 안됩니다. 인기 있는 것을 진열하고 판매해야 손님이 늘고 발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잡화점이 아니라 단일품목을 판매하는 전문매장입니다.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품목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단일품목입니다. 설령 인기가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교회는 끝까지 한가지만을 고집해야 합니다. 망한다고 해도 한가지만을 고집하다가 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그리스도의 피로 세움 받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 피를 가르치고 제공하라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는 인기가 없어서 장사가 안되니까 다른 인기 있는 품목을 가져다 팔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 하겠습니까? 제발 은석교회에서만큼은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귀한 생명이 인기 없는 품목으로 전락되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영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영생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장차 주님이 오시고 영광의 나라가 주어졌을 때 다함께 그 나라에서 만나기 위해서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찾아 나오는 사람은 영생으로 인도 받기를 기대하고 나와야 합니다. 영생 외에 다른 것을 교회에서 기대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교회가 크냐 적냐는 것은 영생과 하등에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큰 교회와 적은 교회의 영생이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큰 교회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영생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뭔가 공허한 말로 들리고, 허황된 말로 들리고, 비현실적인 말로 들리기 때문에 아무리 영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기쁨이 없고 마음에 와 닫는 것이 없고 공허한 마음을 현실성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채워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짓고, 사람 수를 채우고, 선한 사업도 열심히 하고,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임으로서 영생으로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공허한 마음을 메우려고 한 것입니다. 영생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해야 할 교회가 정작 영생을 기대하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른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은석교회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왜 교회에 오셨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마음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오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라면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고 공허한 마음 상태 그대로 돌아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빠져 있는 마음은 현실적인 것으로만 채워집니다. 마음이 이미 현실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현실적인 것이 아닌 영생으로 그 마음이 채워지겠습니까?

제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현실에 빠져서 항상 현실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교회에서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생으로 채워질 수 없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 나오면서 교회를 나와도 기쁨이 없고 마음이 공허하다고 한탄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여러분의 삶에서 있으나마나하고,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인 의미 없는 단체가 되어버릴 것이고 교회에서의 시간 역시 차라리 밖에서 친구를 만나는 시간보다 못한 시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고 하면서 신자 아닌 자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신자라고 할 때는 세상사람과 분명한 차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발람이 모압으로 가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상사람들과 어떤 차이를 두고 대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창 12:3절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주어질 세상에 대한 혜택입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대우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특별난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창대케 하시고자 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자기 이름의 창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를 포기하는 삶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 역할이 이스라엘에게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곧 '나도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는 고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함께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중에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항상 현실에 눈을 돌리고 현실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신 그 모습이 이제 우리에게는 복의 근원입니다. 바로 그분, 자기를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분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받은 자를 내세워서 그자를 축복하면 복을 주고 저주하면 그자도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축복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축복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복을 빌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환영하고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안에 거하는 것이 복인줄 알고 주님 안에 살기를 소원하는 그것이 주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축복하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주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 나 하나는 포기해야하는 인생에 기꺼이 뛰어 들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찾아 나온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며, 주님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은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여전히 현실에 대하여 부족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해서 세상에서 뛰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홀로 처한다는 것이 복을 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입니다. 홀로 처한다는 것은 세상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습니다. 보통 나라와 달리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신다고 해서 열방 중에 뛰어난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세상과 똑같이 살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나와 부딪히고 나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고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예수님처럼 되기는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축복하는 것이고 그자는 하나님이 복을 받아 삽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처럼 되고자 소원하십니까? 그렇게 되려고 힘쓰며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친 자로 마쳐지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발람의 소원이었습니다.

10절에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보다'고 합니다. 발람은 자기의 종말이 이스라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바친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처럼 사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얘기들이 과연 우리들의 현실과 얼마나 연관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의 전부를 헌신하고 산다고 해도 우리의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해서 현실적인 시각에서 볼 때 신자가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쓸데없고 허황된 말로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저주 안에 있는 증거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영생과 멸망으로 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축복하면 영생을 주시고, 저주하면 저주해 버리십니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상에 던지셔서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생으로 인도하시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저주하시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발람이 자신이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바란다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하셨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죽음같이 죽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생이나,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머나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흘러 들어버리고 현실을 사는데 가치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영생보다는 직장문제가, 결혼문제가, 자식문제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여러분에게 인기 없는 품목으로 밀려나 버린 문제가 또 다시 등장합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말씀 앞에 나오는 시간마다 등장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심각한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축복 편에 서시겠다면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사랑하며 내 삶 또한 주님 같기를 소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동안 영생이 현실성이 없다고 관심 두지 않고 뒤로 밀쳐버렸다면 이제 오늘 그 영생에 관심을 두시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발람의 소원처럼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는 기도와 찬양이 여러분에게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분명히 여호와의 복에 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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