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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와 안식 (민 28: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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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안식 (민 28:26-31 )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세상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어떤 굴레가 씌워질 때 인간은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굴레라는 것은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고 압박을 주고 심적인 부담과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구속해 버립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굴레 속에서 살기를 거부합니다. 직장이 굴레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공부가 굴레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가정이 자신의 굴레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굴레를 벗어나면 곧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굴레를 거부하면서도 그 굴레 안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굴레가 자신의 보호막이고 굴레가 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그 압박감이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굴레가 있습니다. 굴레를 벗어났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을 초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세상을 초월한 자가 누가 있습니까? 혹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말 그대로 세상을 초월해서 자기 마음껏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가정에 매이지 않고 직장에 매이지 않고 공부에 매이지 않고 이것저것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제삼자가 볼 때는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초월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아무리 세상을 초월해서 여기저기에 매이지 않고 마음껏 살아가는 사람도 한가지 굴레는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굴레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라는 굴레입니다.

세상을 초월해서 마음껏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세상을 초월한 것입니까? 바로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풍요로운 삶과 행복을 위해서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검사 의사로서 사회에서 출세의 길을 달리던 사람들 10여명이 한꺼번에 절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속을 떠나서 진정한 구도자의 길을 걸어보겠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을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짓거리로 보일 것입니다. 세상의 출세를 다 뿌리치고 아무것도 아닌 도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게 보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가족들이 큰 실망 속에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영화를 미련 없이 떠나버린 그들의 행위에 위대함을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저것이 과연 세속이란 굴레를 벗는 길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볼 때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세상을 등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직장이나 가족이라는 굴레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나'라고 하는 굴레는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라고 하는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바라보고 고민을 하고 번민과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남으로 시작됩니다. 단지 세상을 초월했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유를 누린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혼란으로 빠져들어가고 말것입니다. 모두가 직장을 버리고 학교를 버리고 가정을 버려버린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유는 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라는 굴레를 벗어나 살아갈 때 직장에서도 직장에 매이지 않고 학교에서도 공부에 매이지 않고 가정에서도 가족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이지 않는 다는 것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직장인, 학생, 가장, 주부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소홀히 해도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되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이며 진정으로 세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나를 벗어나서 다른 분을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을 벗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 여부에 상관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사랑이 변하고 믿음이 변한다면 그것은 '나'라는 굴레 속에서, 즉 자기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사랑도 믿음도 아닙니다. 단지 편안한 환경에서 누리는 마음느긋함과 여유 속에서 나오는 선심일 뿐입니다.

사랑은 불변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어느 한순간 화재로 인해서 여자의 얼굴이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을 때 그때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집에 불이 나서 하루아침에 모아논 재산이 다 사라져 버려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어떤 환경에서도 사랑은 불변해야 합니다. 여러분 과연 이러한 불변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사랑이 과연 불변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한계입니다. 만약 자기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사랑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사랑에 모든 소망을 두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이 없습니다. 가슴을 헤집고 아무리 찾아봐도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열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있다면 내 배부름과 편안과 행복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대 교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지 배부름의 관계가 아닙니다. 배부르면 사랑하고 배고프면 원망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고 나서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면 소리 높여 찬양하고 떠들면서 목숨이라도 바칠 듯이 하더니만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문이 없는 환경이 주어지니까 찬송이 한순간 원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배부름의 관계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이런 관계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건강이 주어지고 양식이 주어지고 고통과 아픔이 주어진 것은 신자를 배부름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참된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자식이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이도 나를 낳으신 부모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부모와 자식도 배부름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어도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곧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제사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또 다시 제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제사에 대한 규례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제사 규례를 말씀하시는 것은 제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고 중요하니까 또 다시 강조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모세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들어가지 못하고 그 역할이 여호수아로 교체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은 바로 교체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세가 목자가 인도자일 때나 여호수아가 인도자일 때나 변함없이 제사다는 것입니다. 즉 제사는 누가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된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계속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관심을 피에 두고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피가 이스라엘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로 용서함 받는 것 외에 다른 길로 나가는 것은 저주받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31절에 보면 상번제를 드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번제는 4절에 보면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피로써 시작하고 마칠 때도 피로써 마치라는 것입니다. 피와 피사이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아침에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 오늘 하루도 흠없는 양의 희생으로 삽니다'라고 기도하고, 저녁에 하루를 마치면서 '하나님 오늘도 죄지은 것 흠없는 양의 피로서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천국 백성입니다.

피와 피사이에서 오직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제사로 시작해서 제사로 마치는 인생을 산다고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제사가 빠진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을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나의 향기로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피만을 기뻐하십니다. 피가 곧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며 식물이며 향기입니다. 다른 것은 더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은 자꾸 세상의 것, 더러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려고 아우성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분 좋게 만들어서 다른 혜택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헌금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나, 교회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나 그외 피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은 오직 피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가 귀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라고 하면서도 자꾸 엉뚱한 것을 요구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가 귀한 줄을 안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나오는 것도 예수님이 피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라는 입장에서 언제나 여러분의 행동을 보면서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분이 과연 자발적으로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좋아서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으로 살아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를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은 언제나 그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강압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강압이 들어가게 되면 저 사람이 과연 목사의 압력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눈치 때문에 하는 것인지의 여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구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점검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강요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귀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해도 유창한 기도를 함으로서 자기의 믿음과 유식함을 과시하려고 할 것이고, 직분도 인간의 조직 안에서의 자기 자리 확보 정도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세상이 또 따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로 모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는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공항에 가면 비행기를 타기 전에 검색을 합니다. 몸에 쇠붙이가 있으면 삐 소리가 울리는 문을 통과하면서 비행기에서 소지해서는 안될 위험물건을 가려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소지할 수 있지만 비행기에서만큼은 소지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린 오늘도 그것을 찾아내서 벗어버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배우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세상이란 노동이 없는 세상입니다. 26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노동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땀흘려서 일해야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노동에는 기술과 능력이 포함됩니다. 기술과 능력이 있는 자는 노동의 효과가 뛰어납니다. 그 사람은 자연히 노동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뛰어난 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그만큼 배부름과 안락이 보장됩니다. 반면에 노동의 기술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고 하위 그룹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경쟁속에서 남을 눌러야 내가 살 수 있고 남이 뒤떨어져야 내가 앞서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 이것이 세상 법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법칙이 전혀 통용될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동이 없는 나라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 열매는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살 때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천국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며 살면 되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미리 배우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일해서 벌어놓은 것으로 살아가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해서 얻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흘리신 고귀한 피로 인해서 얻은 은혜 안에서 뛰놀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을 세상에서 미리 살아가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동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내것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기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모입니다. 이것을 성회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립니다. '나'라고 하는 굴레 안에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천국은 내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단지 누리는 곳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내것이란 없습니다. 내것이 없기 때문에 기쁘게 나누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고 성회로 모이고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국을 배우십시오. 천국을 배우는 것이 곧 안식입니다. '나'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웃을 수 있고 '못생겨도 나는 좋아'할 수 있는 그 나라를 지금부터 배워가십시오.

천국은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천국도 자기만을 위한 천국으로 생각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천국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나혼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한 몸이 되어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지금부터 서로 모이면 사랑하고 도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로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혼자서 하나님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란 모였을 때 드러나는 것이지 혼자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우쭐거리고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숫자 채우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부흥시키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오직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세상사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을 배우는 실습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세상 방식을 용납하고 세상법칙이 통용된다면 어떻게 천국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상번제를 드리라는 것은 날마다 옛사람을 죽이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옛생활 태도를 버리고 천국의 삶을 배우고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확고한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 몸은 심판 받을 세상에 거하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이 마련하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시고 미리 그 나라에서의 삶을 이 땅에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자기를 포기한 나라인데 이 땅에서 자기 포기를 싫어하신다면 어떻게 천국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돈으로 사는 나라가 아닌데 돈에 매여서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면 어떻게 천국에서 사시려고 합니까? '나는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신자인가?'를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보시면서 살피시고 노동이 없는 나라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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