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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책임자 (민 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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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 (민 30:1-16 )

교회는 '그리스도도 사랑하는 무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채 그리스도의 피만 바라보고 나오는 자들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사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도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눈감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지심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죄를 책임지심으로 내가 살았고 생명이 유지됨을 아는 신자라면, 그 사람은 필연코 자신의 생명 자체인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피만 전하고자 힘쓸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그리스도의 피만 전하는 무리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말 앞에서는 소위 교단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며 어떤 단체나 소속이라는 것이 모두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단을 따지고 소속을 따지고 단체를 따지면서 자기편을 가리고 찾고 있습니다. 이사를 가서 교회를 정할 때에도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이런 교단이었는데 이 교회는 어느 교파입니까?'라고 하면서 교단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는 설교인지,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자 모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교단이 어디고, 분위기가 어떻고 하면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잘 도와주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인간 단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동일하니까 그것은 제쳐두고 다른 기준, 즉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해서 교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예수가 아니라 교회를 나타내고 교회를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 좋습니다.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면서 좀 더 많은 손님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에는 관심이 멀어진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지 않으려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되는 십자가의 길은 살살 피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의 위장에 불과하고, 교회는 자기 교회를 높이고 교단을 높이면서 교회와 교단을 전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는 선교단체가 아닙니다. 단지 겉은 그리스도의 피로 위장을 한 채 속은 자기 단체의 이념과 사상을 앞세우고 자기들의 목적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고 활동을 위한 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모이는 목적을 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창조과학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단체의 이름을 보면 이들이 무엇을 목적하고 모였는지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애당초부터 그리스도의 피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과학을 가지고 창조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과학을 통해서 창조를 증명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으로 전도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누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느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느냐에 있습니다. 즉 창조과학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충족성과 만족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만으로는 부족해합니다. 뭔가 다른 참고서를 자꾸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성경을 믿기 위해서 다른 참고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는 그 참고서로서 과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증거를 찾아내어서 그것에다가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으로 가치를 주고 더 점수를 주는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보다는 자신들이 찾아낸 과학적인 증거를 더 신뢰하고 더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충족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학적 증거를 통해서 충족되고 만족된다고 말합니다. 과학을 성경을 돕는 또 하나의 계시로 보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의 한 예를 말씀드렸지만 사실 모든 교회나 선교단체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소속해 있는 단체를 보고 모이고, 내 교회를 바라보고 모이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피만을 바라보고 모이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무엇을 바라보시고 모이셨습니까? 여러분의 눈에 그리스도의 피만 보여지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귀하게 자리하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버려라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전 2:2)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말고는 배우지도 않고 자기 머리속에서 다 지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가치를 두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골 1:21,22을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져주신 피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져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안에서만 의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우리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잘난체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선교단체는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선교하는 죄인이고, 구제하는 죄인이고, 기도하는 죄인이고, 전도하는 죄인입니다. 자신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성경 보는 순간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건 하지 않건 성경을 보건 보지 않건 여전히 죄인입니다. 탐욕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 죄를 주님이 책임지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덕분으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 덕분에 일어난 일인데 그런데 우리가 노력하고 열심을 내자구요?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자구요? 열심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보답하는 것이라구요?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보상이 될 만큼 하찮은 것이었습니까? 인간의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보답해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을 내시려면 자기를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열심을 내어서 그리스도의 피에 보답해 보려고 하는, 그래서 조금이나마 떳떳해져 보려고 하는 자신을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죄를 책임져주신 그리스도를 다시금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죽은 존재이다'고 고백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입술로만 고백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모두 여기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심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는 일에 쓰여져야 합니다. 가정도 부부관계도 직장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고 배우는 일에 쓰여지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서원에 관한 규례입니다. 2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모두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서원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여자가 어려서 아비의 집에서 거할 때에 그 여자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을 때 아비가 그것을 알고도 아무 말이 없으면 서원을 행하되 만약 아비가 허락지 않으면 서원을 이루지 못해도 여호와께서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6-8절에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서원한 것을 이행하지 못하고 결혼했을 경우 비록 아버지가 서원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의 남편이 된 사람이 그 서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서원을 행하여야 하지만 남편이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무효가 되고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신다고 합니다.

9-12절은 부녀들, 즉 결혼한 사람들의 서원에 대한 규례인데 과부나 이혼한 부녀들의 규례입니다. 남편이 죽거나 이혼한 부녀들은 자신들의 서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남편이 있는 부녀들이 서원을 했을 때 남편이 아무 말이 없으면 선원을 행하여야 하지만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무효가 된 것이고 여호와께서는 그 부녀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서원의 규례를 보면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규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서원을 남자가 책임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녀일 때는 아버지가 책임집니다. 즉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아버지가 책임자가 아니라 남편이 책임자가 됩니다. 즉 여자는 남자의 권위와 책임 아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여자에 대한 무시로 보면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나타내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서원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자와 남자의 역할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책임 아래 있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구원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교회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교회가 어떤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는 할 수 있지만 사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등 모든 삶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구약에서도 보여주고 계십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와 역할을 통해서 구원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여자는 옛날 에덴동산에서 맨 처음 뱀에게 유혹 받고 선악과를 따먹은 역할을 맡고, 남자는 그러한 여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책임짐으로 용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자가 서원한 것을 남자가 허락지 않을 때 이행하지 않아도 여호와가 사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책임이 아래 있기 때문에 남자가 책임질 때 하나님은 그 죄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서 구원을 배우게 하시는데, 여자는 죄짓는 역할을 하고 남자는 옳고 그름을 바로 해서 여자를 책임지고 잘 간수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연출자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여지면서 연출자가 의도한 바를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는 드라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감독이고 연출자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라고 우리를 배우로 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나 가정이라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의미 속에 있습니다.

여자는 에덴동산에서 이렇게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남자는 타락해서 지옥가야 함에도 불가하고 남자가 모든 책임을 지고 대신 여자를 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타락자이고, 남자는 책임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책임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8절에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가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고 합니다. 무효가 된다고 합니다. 또 15절에 보면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 남자가 여자의 죄를 담당하고 대신 여자의 죄는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책임진다는 보장만 있다면 여자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도 무효로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남편이 하나님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으면 여자 쪽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무효로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남편 역할을 누가 하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무효화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책임져주는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죄를 무효화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죄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책임자가 있기 때문에 모든 죄가 무효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또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라고 가정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엡 5:23-25절을 보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아내는 교회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의 자리에서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서 나는 타락한 자였지만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책임지심으로 죄가 무효화되었음을 배우는 것이고, 남편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죄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고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주님이 내 죄를 책임져 주신 것에 대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를 말하고, 주님이 내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주님께는 고통이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정을 통해서 부부를 통해서 배워 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주님께 복종하고 있지 못합니다. 타락한 자이면서도 언제나 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습이 아내를 통해서 그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주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지만 그럴 아내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주께 복종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 할 남편의 역할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지 못합니다. 남편도 아내가 잘못을 했을 때 지적하고 책망하기에 바쁘지 아내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책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배우는 것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이고 부부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란 단지 잘먹고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죄를 담당하고 책임져서 나에게는 무효가 선언된 구원을 배우라고 하나님이 남녀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들이 서로 짝짓고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내 마음에 드는 여자니까, 남자니까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것으로 그쳐버리면 안됩니다. 결혼 전부터 무엇을 위한 만남이고 결혼인가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책임자와 죄인의 역할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를 위해서 만나게 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그냥 무효화하신 것이 아닙니다. 책임자가 있기 때문에 무효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자는 우리 죄를 담당하느라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죄를 담당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내 남편이 누구입니까? 나는 평생 그분을 놓치지 않고 그분께만 복종하고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이 구원받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책임지시고 피흘리신 그분의 피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피외에 다른 것은 전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순간 이것을 믿으신다면 오늘부터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를 담당하시고 책임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무효화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말고 보여주라고 부부로 살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다른 목적이 있으면 안됩니다. 오직 우리의 책임자로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증인으로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앞에 다른 목적을 두지 마십시오. 오로지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내 전부를 그리스도께 바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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