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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싸움회피 (민 3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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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회피(민 32:1-15 )

신자가 바른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알고 천국을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이란 인간에게 행복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나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서 고생하지 않고 잘먹고 잘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극락입니다. 극락은 인간을 위한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들의 나라로서 아들에게 복종해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기의 편의를 앞세울 때 그것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하나님을 언급하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자기들이 정통이며 진리라고 주장한다 해도 믿음의 의미를 자기 편의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답을 내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사리사욕이나 개인 축복, 자기 교회의 부흥을 꾀하는 무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인간 개인의 발전 성장과 하나님을 결부시키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폭로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인간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이같은 길을 가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아담의 죄로 인해서 우리 역시 죄인되었고 사망에 처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부활하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대표성에 대해서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절이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이 말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줍니다. 부활이라는 달콤한 말이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좋은 일인데 누가 부활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대표성에서 사람들이 망각해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입니다. 주님이 낮은 자리에 오시고 낮은 자로 사셨다면 신자도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희생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면 우리 역시 자기 희생,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싫어합니다. 자신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표성을 말하면서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인정하려는 나쁜 습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자기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단해 버리게 됩니다. 채플린 흉내내기에서 진짜 채플린이 참석해서 3등을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흉내내기를 심사했던 심사위원들에게 각자 자기들만의 채플린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진짜가 진짜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예수님 흉내내기 대회를 벌이고 거기에 진짜 그리스도가 참석한다면 과연 1등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꼴등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심사하는 인간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이 진짜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진짜가 등장한다고 해도 진짜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사위원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가짜가 확실히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자신의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짜 신자의 모습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신자의 모습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판단에 따라서 우린 진짜 신자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는 성경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것도 성경이고 천국을 보여주는 것도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뿐입니다. 목사의 말을 듣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단지 여러분에게 성경을 설명할 뿐입니다. 판단은 여러분 몫입니다. 그러나 결국 분별은 성령이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성경에 대해서 들으실 때 여러분의 눈에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이 분명히 보여질 것입니다. 마지막때, 거짓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영을 분별하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다는 자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옳은 자의 입장에서 틀린 자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참된 진리란 나는 옳은데 너희는 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틀렸고 더럽다면 나도 틀린 자이고 더러운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항상 옳은 것만을 말하지 않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옳은 자가 있고 틀린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너희는 모두 틀렸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른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옳은 것을 분별하게 되었고 옳은 것을 말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영이 주어졌기 때문이지 내가 옳은 사람이어서 옳은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내가 옳은 것을 말하고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옳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자기편의 위주로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자기 편의라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떠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의 자기편의 위주로 나아가려는 본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오신 성령에 의해서 자기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고, 성령에 의해서 자기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고자 힘쓰게 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른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나 자신이 바른 사람되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내가 비록 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나는 더러운 자다'는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요단강까지 와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고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축을 키우는 것이 그들의 생계 방법이었습니다. 때문에 가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족이 없고 풍부하다는 것이고 가축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의 생애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관심을 가축에 두고 사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 동편에 있는 야셀 땅과 길르앗을 땅을 바라보니 그 땅들이 가축을 키우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었습니다.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서만 살면 가축은 더 번성을 하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삶은 더 풍부해 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가축이었습니다. 가축이 번성하고 잘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동편에 가축을 키우기에 적당한 땅이 보이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들에게 주시는 땅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좋은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싶습니다. 요단을 건너가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요단을 건너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가축을 기르기에 좋은 땅이 자기들의 눈앞에 보인 것이 더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좋은 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곳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신앙이 자기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은혜는 약속의 땅, 즉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과연 은혜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아파트 단지를 황금어장이라고 하면서 아파트 단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자기의 유익과 사리사욕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사업이고 빛과 소금이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번성을 노리고 행동하는 것이나 번성을 가지고 은혜라고 떠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분들은 교회가 번성되는 것이 어떻게 자기 사리사욕이며 잘못이냐고 따집니다. 교회의 번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번성을 목적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홍수로 세상을 멸망하실 때 겨우 노아의 8식구만 구원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아흔 아홉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하게 여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교회에 나오는 아흔 아홉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경험이 있는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잘된 일을 가지고 옆에서 축하할 때 '뭘요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었습니다. 많은 교인들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 전도를 할 때도 이런 식의 말로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복받읍시다' 이런 말로 이생에서의 번성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는 믿음 아닌 것이 믿음으로 행세하고 있고 교회에서는 목사가 여기에 동조해서 믿음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르우벤과 갓 자손 같은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는 눈에 보이는 좋은 환경과 현실을 더 큰 은혜로 생각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으로 건너가기를 원하기보다는 좋은 현실을 더욱 원하는 우리들입니다. 천국의 은혜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것에 더 감동하고 더 감사하고 더 은혜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르우벤과 갓 자손을 등장시켜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앙입니까? 그것을 말하는 것이 6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왜 싸우지 않으려고 하느냐?'가 모세의 책망입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싸워야 한다는 것에는 마음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땅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고 그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싸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민수기의 시작은 싸움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사로서 여호와의 전쟁에 동원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자 역시 싸움에 동원된 사람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도 싸움은 필연코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바로 르우벤과 갓 자손 같은 사고방식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백성을 낙심케 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악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 갈 수 없게 하려느냐'는 말씀을 보면 모세는 그 두지파의 사고방식은 다른 지파를 낙심케 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정탐꾼의 얘기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을 함으로서 다른 형제들을 낙심케 해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었던 사건을 말하면서 형제를 낙심케 하는 것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낙심케 하는 사고방식과 싸워야 합니다. 르우벤 갓 자손과 같이 '이 땅이 좋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요단을 건너가지 않겠습니다'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싸워야 할 사람을 싸움이 싫어지게 만들고 현실로 만족하도록 만드는 사고방식이 신자의 싸움의 대상입니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나를 해치고 미워하는 이웃이 아니라 바로 내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은 싸움이라고 할 때 선뜻 하나님의 군사로서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싸운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나 하는 자신의 본성과의 대립을 말하는데 쉽게 이 싸움에 나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그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면서 인생을 유지하고 연장하고 싶은 태만과 교만이 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자신의 환경이 성공과 번성으로 달리고 있고 별부족함이 없이 모든 일이 잘풀려가고 있는데 그냥 감사하고 예배에 안 빠지면서 교회에 다니면 되지 굳이 피곤하게 싸움이니 뭐니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편안함이란 그속에 안주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 편안한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고 요단을 건너가서 싸움에 임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싸움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의 행동은 다른 지파들까지도 낙심케 만드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요단을 건너가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지파들에게 르우벤과 갓 자손의 행동은 참으로 낙심을 줄만한 것이었습니다. 가령 교회에서 열심히 천국을 바라보면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은 현실을 자랑하고 현실에 만족하면서 싸움과 전혀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를 입고 낙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15절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지금 르우벤과 갓 자손의 경우를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라고 합니다. 형제를 낙심케 했던 죄를 이어서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행동을 여호와를 떠난 것으로 책망합니다. 분명히 이들은 여호와를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동편의 땅에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호와를 떠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싸움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 두 지파의 경우가 여호와를 떠난 것이라면 지금 세상에서의 번성과 발전을 꾀하면서 이생의 복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합니까? 모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를 떠난 자들'이라고 책망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내속에 있는 세상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번성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것으로 천국가지 못함을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천국갈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이런 사람이 날마다 자기와 싸우는 사람인 것입니다. 형제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생의 것을 내세웠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도 역시 자기와의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싸움은 자기를 부수고 무너뜨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현실 때문에 이 싸움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주께 복종시키십시오. 세상사람들은 자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포장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신자는 반대로 자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서지고 또 부서지십시오. 가루가 되어서 하나님이 나 자신을 하나님이 뜻하는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도록 부서지십시오. 이 싸움을 죽을 때까지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현실을 보면 현실에 주저앉아서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생각만 들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가축 기르기에 좋은 땅이 아닙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서 현실에 매이지 않는 싸움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하는 나쁜 생각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나쁜 생각을 드러낼 때 이로 인해서 형제를 낙심케 하고 그들도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르우벤, 갓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의 축복으로 안주하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은 여호와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게 하는 생각과 싸우기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비록 힘들어도 싸움의 승리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복을 안겨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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