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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자 (민 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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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태도는 성경을 신을 연구하는 참고서로 보는 것입니다. 신학자란 하나님을 연구해서 그 결과를 발표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밥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신학 연구가 단지 밥 먹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직업상 필요한 신으로 존재하게 될 위험성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절대 필요한 분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찾아야 하고, 겸손히 성경에서만 계시하는 하나님을 찾아서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자기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자기 신학의 깊이를 자랑하기 위해서 찾는다면 그것은 불신자가 단지 하나님이라는 신을 연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든 신자든 하나님을 찾는 것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으로 인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목사라는 직업으로 밥먹고 살기 위해서 설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의 배를 위해서 찾는다면 불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이 자신을 인도하는 곳으로 끌려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도 받아야 할 말씀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자신을 이끄는 기도를 차단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점차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멀어지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나도 함께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과 자기가 가는 길을 따로 구별해 놓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신자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고생하는 길을 가신 덕분에 나는 편안한 길을 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등쳐먹는 것이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면 고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고통이 아닙니다. 고통을 종교화하는 것은 전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 넣으면서 인내속에서 도를 찾고자 애씁니다.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손이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는 고통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입니다.

룻기서에 보면 룻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말을 듣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로 갑니다. 그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은 효성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룻을 통해서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고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다. 결코 나오미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리고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어서 돌아오는 처지였습니다. 룻은 그 모든 것을 다 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기 시어머니를 그토록 철저하게 망하도록 하신 하나님을 자기도 믿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복주고 부자 되게 하신 하나님이라면 몰라도 철저하게 망하게 하신 하나님을 자기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믿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는 믿음의 길에 함께 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교회란 이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설교는 이 고난이 싫은 사람은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듯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사람만 나오라고 외치는 것이 설교인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을 과연 누가 가겠습니까? 고난이 단지 외부의 핍박이나 밥굶는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인간의 힘과 의지로도 감수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한다는데 과연 이 믿음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고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길을 나 혼자라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를 이 고난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도 받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인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인도해주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목표하는 일들이 잘 풀려 가는 쪽으로 인도해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고통을 당해서 고난의 길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고 망하게 하신 하나님이실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감사하면서 가야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할 수밖에 없는 믿음의 길을 외로이 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 길로 인도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슬슬 뒤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신자는 이미 자기의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다 빼앗겨 버린 자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올 때 이미 다 빼앗겨 버린 무의 상태로 나왔다면 성공하는 속에서도 주만 바라볼 것이고, 망하는 속에서도 주만 바라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일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께 다 빼앗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을 소유하고 지키기 위해서 고민과 걱정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과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다 잃어버린 무의 상태에서 주만 바라보고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행되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분만이 오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요단 가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까지의 노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하에 그 항오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을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모세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관할하에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노정은 모세가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대로 노정을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누군가 인도자를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인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 미리 모세에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자기의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세운 것 때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서 40년의 세월을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나이 들어 힘이 없을 때 부르십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이 힘이 없음을 내세워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를 보내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모세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후부터 오직 하나님이 인도를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부터 인도함 받는 것, 그것이 진짜 인도일 것입니다.

5-49절까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서 진쳤던 모든 노정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는 홍해로 가로막히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그야말로 망하는 길로 인도함 받는 것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인도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좋은 길을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만난 모세였기에 다른 길은 생각지 않고 비록 망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주저 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아는 자로부터 인도함을 받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참된 하나님께로 정확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아니까 내 스스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인도함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천국을 가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난 모세로부터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애굽에서 상상하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셔서 그 힘으로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힘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만 유지되는 나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은총과 은혜로 유지되는 나라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고 오직 은총과 은혜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인도하셨던 것은 바로 이런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심판 받고 사라질 세상의 것은 다 하나님께 빼앗겨 버리고 오직 은총과 은혜로만 살아가는 신자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 신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기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심판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과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아들만 남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도 아들에 대한 심판이 있었습니다. 4절에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애굽 사람들은 마지막 재앙으로 죽은 장자를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노래부르며 구원받는데 한쪽은 울면서 죽은 아들을 장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지막때 일어날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의 장자가 죽음으로 만들어 진 것이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출 4:22,23을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장자이기 때문에 살 것이고, 바로의 장자는 다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은 살고 애굽은 죽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일을 겪게 됩니다. 모세는 방금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은 장자이며 바로의 장자를 죽여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만드실 것임을 들었습니다. 때문에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장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애굽의 장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죽게 되었을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 앞에 던집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내게 피남편이다'는 말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모세는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피 남편은 곧 할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육신을 죽이는 표입니다. 육신은 죽고 새롭게 살았다는 의미가 할례입니다. 결국 모세는 아들의 할례로 인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을 단지 혈통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을 죽여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애굽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육신을 죽이는 자가 산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육신을 죽이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죽일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롬 8: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인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들인데, 지금 살펴본 대로 구약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애굽의 장자가 죽은 가운데서 아들이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육이 죽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서 육신을 죽이는 자, 즉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육신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노력과 힘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올 때 애굽인은 모든 장자를 장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앞으로 하나님의 장자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노정 역시도 장자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드러내는 행동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을 이 땅에 만들고 싶어하시고,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천국을 이루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주님이 참된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의 인도자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모든 잃은 자로서 오직 은총과 은혜로 감사하는 삶을 배우고자 자기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하나님께 나오고자 해야 합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아들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인도함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찾아 나오십니까? 왜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이 보여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잃은 자로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여러분의 가슴속에 살아서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은혜로 살고자 힘쓰시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서 끌어가 주지 않으면 나는 애굽의 장자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간절히 주께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로서 은총과 은혜로만 감사하는 나라인데, 우리가 어떻게 옛사람의 모습으로 이 인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으로 인도함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줄 인도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 모세를 통해서 인도함 받았듯이 오늘 우리들도 모세를 통해서 인도함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인도를 받았듯이 오늘 우리들도 역시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께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사도들을 통해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차단해 버리고 기도를 차단해 버린 상태에서 인도를 받겠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도자는 말씀 안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벽을 쌓고 있으면서 과연 무엇으로 인도 받고자 하는 것입니까? 목사가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목사 역시 말씀을 통해서 인도 받을 뿐입니다. 결국 말씀에 벽을 쌓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인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자리로 인도 받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애굽의 장자를 죽이고 자기 아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외로운 믿음의 길이지만 주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인도 받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천국에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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