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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원칙 (민 35: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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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만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이 있을 때 끊임없이 물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대하는 모든 사물과 현실에 대해서 물으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물론 알면서도 고의로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상대방을 시험하기 위해서나 또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묻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물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묻는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묻고 해답을 얻는 삶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물음은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인간이 답을 내릴 수 있는 것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답을 내릴 수 있는 경우는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서 물었거나 인간의 지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물었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비행기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해서 충분하고 완벽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또 '바닷물이 왜 파란가?'에 대한 물음에도 인간의 과학적인 지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인간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물음입니다. 결국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은 인간 지식의 범위 안에서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지식을 초월한 물음에는 수없이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인간 존재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동안 반복되어진 물음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인간 존재성에 대한 무수한 물음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지금껏 이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이 질문자이면서 동시에 질문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한 개인의 의문과 물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의문이요 물음입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의문이며 물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묻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답을 누가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인간 중에 누군가가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과 물음이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답을 내린다고 해도 또 다른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뿐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답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의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제가 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완성된 그릇은 자신이 그릇이라는 것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지식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왜 만들어 졌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답은 그릇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릇을 만든 자가 알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릇을 만든 의도는 만든 자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든 자가 그릇에게 '너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다'라는 답을 내리기 전에는 그릇은 끊임없이 '나는 왜 만들어졌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아실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당연히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어내어야 할 물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것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품고 물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나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왜 인간은 세상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인간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이 물음을 던지고 여기에 대한 답을 얻고자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을 만드신 목적과 의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인간다운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다 각기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원칙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세상을 살아갈 인간의 삶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칙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원칙을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지고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꾸려 가는 모습입니다.

우린 오늘 인간답게 살아가는 원칙을 알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선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인간답게 사는 원칙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한 것은 모든 인간의 궁금점이 아닙니다. 대개의 인간은 어떻게 하면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원칙을 강조하는 하나님은 따분하게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결국 지금의 현실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간답게 사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자를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 되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도 인정하고, 인생의 모든 답은 하나님께서 홀로 주관하신다는 것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게 살아가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난 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인정한다고 큰소리 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답게 사는 원칙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보태어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원칙에는 자신의 포부와 야망이 모두 빠져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야망과 포부를 삽입해서 하나님의 원칙을 수정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원칙에다가 내 희망사항을 삽입시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원칙과 인간의 원칙이 항상 충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어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33절을 보면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 한마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들의 포부와 목표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들이 따로 만들고 정해야 할 원칙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세워주신 원칙의 범위 안에서만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원칙에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보인다고 해도 절대로 자기의 것을 보태면 안됩니다. 가령 신 6: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이 얻을 땅에서 지켜야 할 명령과 규례와 법도, 즉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면 됩니다.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해도 좋으니까 다만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원칙에다가 인간의 행함을 삽입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행함이라는 한계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함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결국 사랑의 표현도 행함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사랑을 행함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하고, 여자들은 상대방의 행함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랑을 의심받게 되기 때문에 결국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사랑의 표현을 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이것이 행함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성 속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했으면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사랑할까요?'라는 것은 없습니다. 가령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바치겠습니다'라고 할 때 십일조 바치는 것은 좋은데 십일조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삶의 원칙은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이미 결정되어졌습니다. 자기의 이상, 야망, 포부는 하나님의 원칙아래서 포기되어져야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포부와 이상, 야망을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변명합니다. 자기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목적이라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포부와 야망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경을 이용해대는 인간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하는 아담의 집단에 동참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분명히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크는 교회로 부흥시켰다고 해도 그것이 죄사함 받는 면죄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표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다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여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참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포부와 야망을 드러냄으로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금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자기 개인의 포부와 이상과 야망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을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본래의 인간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하는 환경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 땅은 자연이 파괴됨으로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 자체가 땅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에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은 이스라엘만 거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기 때문에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여기에 관심을 두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고 축복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기반입니다. 어디를 가도 땅을 밟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로 살아가야 할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신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더럽힌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창 4: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것에 대한 반발이며 아벨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땅이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끗하게 창조하신 땅을 더럽히는 인간의 행위를 고발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반발과 인간에 대한 미움이 땅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서 저주받은 세상을 물로 깨끗이 씻어버린 것입니다. 심판의 이유는 땅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를 살려놓으심으로서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유지되는 땅임을 전파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가리울 때 그 인간은 땅을 더럽히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결국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와 우연히 죽인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나옵니다. 고의로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도피성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피는 반드시 피로서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고 도피성에서는 대제사장으로 인해서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연히 살인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하지 않고 신세 망친 사람입니다. 이것이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된 불우한 환경인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발생된 약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자를 남겨두신 것은 인간의 처음의 모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살 수 없는 약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약자가 발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피를 흘린 자들로서 피로서 피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다 죽어야 할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에 있는 제사장 때문에 살려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구나'를 알 때 자기들의 포부와 야망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약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 살아가는 참된 인간의 모습이며 땅을 더럽히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결코 죄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우리의 죄 때문에 더렵혀진 땅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 대신 자신의 피를 쏟아서 땅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땅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에 의해서 깨끗해진 땅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의 원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을 더럽힌 장본인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피를 흘려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땅은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개인의 야망과 포부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가 딛고 서 있는 땅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땅이고, 여러분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 덕분에 살고 있음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포부와 야망을 그리스도에 피에 더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희생을 밟고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자랑할 수 있고 자기보다 가진 것이 적고 배우지 못하고 뒤떨어진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땅을 더럽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피를 믿지 않는 자들을 때가 되면 반드시 그 피로서 갚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밟고 살아가는 땅을 볼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밟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오늘도 살아간다'는 것을 상기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 땅을 깨끗이 하는데 봉사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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