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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의 희망 (민 3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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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희망(민 36:1-13)

인간은 현재의 불만 속에서 과거를 후회하거나 동경하며 미래를 희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거란 좋았든 나빴든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는 지금의 처지보다 좀더 나은 환경을 꿈꾸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비록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 속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미래를 물으면서 살아갑니다. 내일, 모레, 또는 몇 년 후 몇십 년 후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 가정에 내 나라에 이 지구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정확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걱정하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는 더욱 더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희망을 가져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늘날 사람들의 희망은 철저하게 현실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묻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인간의 상상일 뿐 실재로 존재하는 않은 세계일 것이라는 의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내세라는 것에는 희망을 두려고 하지 않고 오직 현실 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도 없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 종점이라면 인간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또 그 희망대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희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희망이란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일 뿐 그 누구도 이것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인간의 희망과 죽음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린 것은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희망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임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란 내 뜻대로 내 마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다만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인생이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참으로 쓸데없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죽음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삽니다. 특히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받고 대우받을 때 죽음의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높여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흡족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흔적을 우리의 삶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병이 들고, 늙어 가고, 노동을 해야 하고, 한평생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죽음의 신호탄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있는 죽음의 흔적은 생각지도 않은채 현실의 희망만 품고 산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말씀을 듣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이시간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죽음의 흔적을 분명히 발견하고 나오셔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불사약, 불로초라는 있지도 않은 약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피라밋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 무엇도 죽음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안에서만 해결되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해결은 죄문제를 해결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죄문제만 해결하면 죽음에 대한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죽어야 하고 피흘려야 하는 그 요구에도 자기의 희망을 드러내지 않고 순종하심으로 죄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신자의 삶의 원칙이 무엇이었습니까?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치 못하는 우리로 인해서 피흘려진 땅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예수의 피가 흘려진 땅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며 사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죽음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죽음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죄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속에서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죽음의 흔적은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만, 불평, 슬픔, 불행감 그 모든 것이 죽음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죄 때문에 스스로 짊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모두 남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자기 불행의 원인을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여러분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을 느끼고 불만이 있고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생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인생을 생각하면 불행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불행한 인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한마디로 표현하면 순종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자기 희망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이고 죽음의 흔적인 것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다가 자식이 취직이 안돼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의 흔적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 욕심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죄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십시오. 사고를 당했다면 내가 죄가운데 살기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십시오. 죄악 가운데 살면서 자기 희망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신자는 자포자기한채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희망을 두지 말고 다른 세계에 희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피할 수 없고 벗어버릴 수 없는 죄악으로 인해서 죽음의 흔적을 몸에 지난 채 인생을 살아가지만 이 죄를 완전히 벗어버릴 그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희망으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희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고 오직 죽음의 흔적만 가득 가진 채 결국 멸망으로 사라질 세상으로 볼 때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희망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슬로브핫의 딸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린 민 27:1-11절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기들에게 기업을 달라는 요청을 함으로서 그들에게도 아비의 기업이 주어졌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들에게는 기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게 되면 결국 슬로브핫의 딸이 속해 있는 지파의 기업이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기업을 보존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슬로브핫의 딸들의 결혼은 단지 남녀간의 결혼이 아니라 기업을 짊어지고 그 기업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결혼인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결혼할 때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자기 행복을 위해서나, 미래의 희망을 안고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전달하기 위한 결혼인 것입니다. 시집을 가되 자기를 위한 시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멋대로 자기 인생을 위해서 자기 마음에 대는 남자를 골라서 시집을 가게 되면 한 지파의 기업이 상실되어 버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기업이 엉뚱한 지파에게로 흘러가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결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기업이 그대로 전달되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결혼에 대한 어떤 법칙을 찾아내기보다는 신자된 사람으로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죽음의 흔적을 지닌 채 산다고 했습니다. 죄가운데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이지만 그러나 죽음을 이길 수는 있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죽음이라는 사슬에 묶이게 했던 죄의 문제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아들을 희생의 자리로 보내셔서 부활을 가능케 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지금 여러분이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흔적 위에 은혜의 흔적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고 죽음의 흔적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흔적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자기의 희망을 앞세운 채 내 인생을 위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내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죽음의 흔적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죽음 속에서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중요하고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더 귀한 일임을 깨닫고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곧 은혜의 흔적을 나타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이 땅에 저주받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하기 때문에 세상이 악한 것이고 내가 악하기 때문에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세를 모른 채 온통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여러분은 다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대로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택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시집을 가도 하나님의 기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가도 은혜를 나타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내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음에 서서 산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잊고 살기 때문에 죽음 위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은혜의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입으로만 은혜를 떠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세상의 악함이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직 자기 행복을 찾아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 피흘리셔서 주어진 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만이 피흘리신 주님을 원할 것입니다. 죽음의 흔적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는 예수의 피를 믿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잊어버렸는데 어떻게 죽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피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멈출 수 없고 죄를 고칠 수도 없는 인간입니다. 죄속에서 죽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깨끗케 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새하늘과 새땅이지 우리의 죄로 더러워진 이 땅이 아닙니다.

더러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새하늘과 새땅에 공짜로 들어가게 하시는 사랑과 자비, 그것이 곧 신자된 우리의 희망입니다. 슬로브핫의 딸은 마음대로 살아갈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업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이 주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전달해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주며 살아갑니까?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자식이 잘되는 것이 행복하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행복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인생의 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 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사랑과 자비를 지키는 삶이 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내 죄 때문에 짜증이 나고 걱정이 생기고 근심이 일어나고 불평이 날 때마다 여러분에게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럴때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 삶의 목표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순탄치 못하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세상살이가 순탄하면 행복해지고 순탄치 못하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세상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고 내 편하기만 희망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은 죽음인 것을 잊지 마시고 모든 희망을 새하늘과 새땅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이 짊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고 복음을 지키고 복음이 전달되어지는 삶이 되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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